고종석 칼럼

좌파’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상반된 두 의미 맥락에 걸터앉아 있다. 첫째는 일부 지식분자가 자신의 ‘지식인 됨’을 뽐내려고 이 말을 꺼내 드는 경우다. 다시 말해 이때의 ‘좌파’는 일종의 이념적 장신구다. 둘째는, 사실 이쪽이 훨씬 압도적인데, 극우 세력이 자신의 반대파에게 낙인을 찍기 위해 이 말을 불러내는 경우다. 이 맥락에서 좌파라는 말은 흔히 ‘친북’이나 ‘반미’ 같은 ‘으르렁 말’과 겹친다. 그래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들도 좌파라는 주홍글씨의 서판(書板)이 된다. 좌파의 역사에서 일부 사회주의자가 자유주의자들을 ‘주(主)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 사회주의가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와 양립하기 힘든 국제주의라는 점을 생각하면, 극우 세력의 이 ‘좌파 타령’은 우스꽝스러운 용법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용법이,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친 한국 정치 지형에서는 적잖은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뒤틀려 있다는 핑계로 좌파라는 말을 버릴 수는 없다. 이 말은 프랑스 혁명 이래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상징하는, 다시 말해 인간의 자존을 떠받들어온 귀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좌파란 무엇인가? 그것이 가리키는 잡다한 레퍼런트(대상) 가운데 하나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간섭해야 한다고 여기는 정치 세력이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좌파는 누구인가?

한국 정치 지형에서 좌파는 누구인가?


먼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또는 사회당 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 국민참여당과 그 지지자들은 어떤가? 그들 가운데 일부는 좌파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당들 자체는 중도우파 세력, 곧 자유주의 세력이다. 그러니 한국 정치 지형은 ‘우파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의 프로파간다(선전) 속에서 좌파는 흔히 용공주의자(로 여겨진)다. 사실은 이것이 한국의 리버럴한 주류 정치 세력들로 하여금 좌파를 자처하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좌파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1990년대 초에 이미 파탄했다.

하나 공산주의의 파탄이 그대로 좌파의 파탄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두고서 논쟁을 벌이다 떠들썩하게 결별한 프랑스 지식인 둘을 알고 있다. 그때 이 전쟁을 미(美) 제국주의에 맞선 불가피한 항전으로 규정한 사르트르만이 아니라, 북한의 선공(先攻)을 좌파답지 않은 일탈로 규정한 메를로퐁티도 우리는 좌파로 여긴다. 때때로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과격했던 사르트르의 정치적 실천은 오늘날 거의 아무런 메아리도 얻고 있지 않지만, 비(非)공산 좌파들의 연대와 협력을 모색한 메를로퐁티의 정치적 실천은 현실 속에서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며 메아리를 얻고 있다.

그 이념적 계보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게까지 올라가는 이 반공 좌파의 생김새는 여러 가지다. 어떤 좌파는 시장에 비교적 너그럽고 또 다른 좌파는 엄격하다. 어떤 좌파는
노동조합과 밀착해 있고, 또 다른 좌파는 노조와 데면데면하다. 그러나 모든 좌파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에 우호적이다. 이 당들은 ‘평등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에 정신적 기원을 둔다. 프랑스 혁명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이었지만, 그 부르주아적 가치 속에 민주주의를 녹여냈다는 점에서 ‘탈부르주아 혁명’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한국 사회의 뒤틀린 이념 지형을 치유하는 길은 둘이다. 하나는 민주당의 ‘탈부르주아화’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 정당들의 주류화이다. 둘 다 쉽지 않은 과제지만, 기존 민중 정당들의 주류화보다는 민주당의 탈부르주아화가 덜 힘들어 보인다. 민주당의 탈부르주아화란 민주당이 좌파 정당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10년 집권기 동안 전형적 우파 정당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좌파 정당’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민주당은 이제 진짜 좌파 정당이 되어야 한다. 즉 한나라당의 프로파간다 속에서만 존재하는 좌파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좌파가 되어야 한다. 정동영씨의 ‘담대한 진보’라는 게 정확히 뭘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민주당의 좌파 정당화를 가리키는 것이기를 바란다. ‘좌파’라는 말은 일부 지식분자의 이념적 장신구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려는 노력의
기호가 되어야 한다. 그 노력 속에서 ‘좌파면 어때?’라는 소극성은 ‘좌파라서 다행이야!’라는 적극성으로 변할 것이다.

시사IN

by 정의의 느티나무숲 | 2011/03/25 00:20 | 객담 | 트랙백(3)

김수환

김수환(金壽煥, 음력 1922년5월 8일/양력 1922년 7월 2일 ~ 2009년 2월 16일)은 한국천주교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로,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모태 신앙인으로 태어나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대주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 당시 군사 독재정권 퇴진 운동과, 시민 활동을 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부터는 사회 운동과 방송 활동, 복지 사업, 언론 활동,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 그는 살아생전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1] 또한,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2]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로마교구의 '산 펠리체 다 칸탈리체 첸토첼레 성당' 명예주임사제직의 사제급 추기경이었다.


위키백과

by 정의의 느티나무숲 | 2011/03/24 23:33 | 객담 | 트랙백(8)

발표

우리나라의 척박한 기업생태계를 줄곧 비판해온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일상화한 대ㆍ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관행을 '동물원 세계'에 비유했다.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포럼에서다. 안철수연구소의 설립자로서 쌓아온 명성과 경험에 비춰 그의 발언은 어느 누구의 말보다 가슴에 와 닿는다. 정책당국자나 대기업 총수들은 책상머리에서 동반성장을 강조하기에 앞서 그의 생생한 얘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크다.

발언의 요지는 이렇다. 한국의 중소기업이나 신생업체는 삼성 현대차 LG SK 등 대기업에 납품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독점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순간 '삼성동물원''LG동물원'에 갇히고 결국 죽거나 미이라가 돼야만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는 구조적 불공정 관행의 사례로 소프트웨어 산업을 꼽으며 "대기업 소속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중소기업에 (불공정) 하청을 주는 식으로 시장이 형성되다 보니 중소기업과 산업인력이 성장하지 못하고 국가경제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은 국가경제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해 위험을 줄이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지만 지금 한국에선 중소기업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고 경고하며 중견기업(종업원 300~999명) 비중 역시 0.2%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시장 감시 당국의 역할과 대기업 총수의 의지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공정거래위에 제소되는 건수의 10배, 100배나 되는 불법적인 일들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데도 공정위가 고발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기업 구매담당 조직의 인사시스템 혁신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안 교수의 얘기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과 함께 "1970년대 이후 대기업으로 성장한 중소기업을 찾기 어렵다"고 누차 개탄해온 까닭이다. 특혜와 이권으로 성장한 재벌들이 어른답게 기업 생태계의 번성을 이끌기는커녕 씨를 말리는 착취적 행태를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정부와 대기업은 섭섭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국민의 평균적 인식임을 깨닫기 바란다.

by 정의의 느티나무숲 | 2011/03/24 23:29 | 객담 | 트랙백(1)

[펌]말괄량이 소녀, 수녀가 되다-프레시안

말괄량이 소녀, 수녀가 되다

▲ 기도하는 마르셀리나 수녀. ⓒ프레시안
마르셀리나 수녀(45·본명 안미숙)는 디딤자리의 원장이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자처한 '엄마 노릇'이 벌써 5년째다.

늘 마르셀리나 수녀는 살림꾼이 다 됐다. 그가 장을 보러 가서 늦게 돌아온다면 사은품을 받기 위해 줄에 선 것이 분명하다. 수녀복을 입은 채로 줄 서는 게 이젠 부끄럽지 않다.

마르셀리나 수녀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조용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요즘은 티켓이 비싸 콘서트 한 번 못가지만 예전에는 빠지지 않고 따라다녔다. 호기심도 많았다. 한 번은 새로 지은 63빌딩을 보겠다고 밤기차로 상경했다.

마르셀리나 수녀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전공하고 가톨릭 교구청에서 일하면서 수녀의 삶에 매력을 느껴 결국 1990년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수녀가 됐다. 아마도 그가 수녀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결정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르셀리나 수녀의 집안 사람들은 모두 가톨릭을 믿었다. 올해 의거 100주년을 맞아 조명 받은 안중근 의사(세례명 도마)의 조카가 그의 할아버지다. 그의 할아버지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2007년 세상을 떴다. 끝내 할아버지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한 채….

벌써 수녀 생활 20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장애를 가졌기에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아이들을 사회에서 다시 버림받게 할 수 없다는 마르셀리나 수녀는 가톨릭의 '까리따스(Caritas·자선)' 정신을 늘 가슴에 새긴다.

아이들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다는 수녀 마르셀리나. 그는 오늘 새벽에도 낡은 앞치마를 수녀복 위에 두른다.

by 정의의 느티나무숲 | 2009/11/28 11:13 | 정의의 느티나무숲 | 트랙백(1)

11월 19일(木) 말씀

- 촛불묵상 말씀

신명기 11장 8-9절

8. 그러니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힘을 얻고, 당신들이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 글어가서,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할 것입니다.
9. 또한 주님께서 당신들 조상과 그 자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오래 살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8.  "그러니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을 지켜라. 그러면 너희는 힘을 얻고, 너희가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할 것이다.

9. 또한 주께서, 너희 조상과 그 자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 '너희'를 '당신들' 로 '~이다'의 문장종결 문구를 '~입니다'로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번역]
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힘을 얻어 너희가 이제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을 과연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9. 또한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과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 시편교독 62편

인도자 :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회중: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인도자 :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회중 :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
인도자 :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회중 : 하나님께서 한 마디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표준새번역]
1.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2.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3. 기울어 가는 담과도 같고 무너지는 돌담과도 같은 사람을, 너희가 죽이려고 다 함께 추격하니, 너희가 언제까지 그리하겠느냐?
4.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 해주는 축복이 속으로는 저주로구나. (셀라)
5.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그에게서 온다.
6.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7. 내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내 견고한 바위이시요, 나의 피난처이시다.
8.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셀라)
9.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
10. 억압하는 힘을 의지하지 말고, 빼앗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헛된 희망을 믿지 말며, 재물이 늘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11. 하나님께서 한 마디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12.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 1-4절을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였으며, 10-12절을 교독하면서 12절 후반부를 함께 읽었다.

[공동번역]
1. 나의 구원이 그분에게서 오니, 내 영혼은 오직 하느님 품에서 안온하구나.
2. 그분 홀로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3. 너희는 언제까지 한 사람에게 덤비려느냐? 너희들 모두 언제까지 그를 덮치려느냐? 마치도 기울어지는 성벽같이, 무너지는 돌담같이.
4. 그들의 꾸미는 일은 사기뿐, 그들의 즐거움은 속임수, 짐짓 거짓을 품고 입으로는 복을 빌면서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셀라)
5.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 품속에서 고이 쉬어라, 나의 희망은 오직 그분에게 있나니.
6. 그분 홀로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7. 내 구원 내 영광은 하느님께 있으니 그분은 나의 힘이신 바위, 나 하느님께 피신하리라.
8. 백성들아, 어떤 일을 당하든지 너희는 하느님을 믿어라. 마음에 있는 걱정일랑 하느님께 쏟아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셀라)
9.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고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도 가볍다.
10. 남을 억압하면서 잘되리라고 믿지 마라. 남의 것을 빼앗아 잘살려는 생각도 버려라. 재물이 쌓인다고 거기에 마음 쏟지 마라.
11. 하느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 두 번 말씀하신 것, 나는 들었사옵니다. 힘은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12. 나의 주, 사랑이시여, 당신께서 하신 말씀,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라는 말씀을. 
 
- 묵상기도

요엘서 2:18

18. 그때에 주님께서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표준새번역]

18. 그 때에 주께서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  '주께서'을 '주님께서'오 바꾸어 인용

[공동번역]

18. 야훼께서는 당신의 땅 생각에 가슴이 타고 당신의 백성 불쌍한 생각이 드시어

- 성경봉독

눅가복음서 7장 11-17절
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나와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였다. "울지 말아라."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표준새번역]
11. 조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상여가 나오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동네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13. 주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
14.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셨다.
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주셨다"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 일정부분 표현을 바꾸어 봉독하였음

[공동번역]
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오고 있었다.
13.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15.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7. 예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 공동축도

고린도후서 13장 12-13절

인도자 : "거룩한 입맞춤으로 축복합니다."(고린도후서 13장 12절)
회중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고린도후서 13장 13절)

[표준새번역]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 정확히 어느 성경 기준인지를 모르겠음


거룩하신 주님 지난 목요일에 용산에 모인 이들을 생각합니다.
큰 추위속에서도 모두 함께 참석하여, 이 억울한 죽음과 불합리한 세상에 저항한 그들을 기억합니다.
주께서도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니 주님은 항상 저들의 고통속에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을 보고 계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믿습니다.
그날 그자리에는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속에 쓰러져간 이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과 같이 세상의 무대응 속에서도 당신의 거룩한 질서를 드러내기 위한 함께 한 자리였음을 기억합니다. 고통과 억압에서 흐느끼는 그들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로 모두를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그들과 함계 함으로 저희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유와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바람은 세상에 홀로 서있는 외로운 사람들로 남아있지 않게 하여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정녕 어려움속에서 삶의 진리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길을 찾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겸손히 구하옵건데, 저들의 외로운 길이 결고 세상의 진리에 대한 패배의 길로 끝나지 않게 하시어, 주님께 보여주셨던 삶의 거룩한 진리와 실천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모든 말씀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by 정의의 느티나무슾 | 2009/11/22 23:04 | 정의의 느티나무숲 | 트랙백(1)

정의의 느티나무숲

Isaiah 61장 1-3 [NASB]

1. 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 is on me, because the LORD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bind up the brokenhearted, to proclaim freedom for the captives and release from darkness for the prisoners,

2.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who mourn,

3. and provide for those who grieve in Zion-- to bestow on them a crown of beauty instead of ashes, the oil of gladness instead of mourning, and a garment of praise instead of a spirit of despair. They will be called oaks of righteousness, a planting of the LORD for the display of his splendor.


이사야 61장 1-3 [공동번역]

1. 주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2.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주님 자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정의의 느티나무숲이 되도록 도움을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나이다. 아멘

by 정의의 느티나무슾 | 2009/11/13 23:25 | 정의의 느티나무숲 | 트랙백(7)

11월 12일(木) 말씀

로마서 8:24-39

[표준 새번역]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끓을 수 없습니다.



[공동번역]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높음도 부터가 39장입니다. 가능한 원문서에 표기를 따랐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에 신음하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을 기억하여 주소서
당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시고 또한 이루셨으니, 여기 모인 이들의 고통과 고난에도 함께 하고 계심을 저희가 알게 하여 주소서
세상의 어떠한 일도 주님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터 저희를 떼어 놓을 수 없음을 알게 하시어, 온갖 의롭지 못한 것에 맞서는 저희의 힘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영혼들을 기억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한 세상의 어려움에 당당히 서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의 하루하루를 당신의 거룩한 빛으로 함께 하여 주소서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빛 안에서 세상의 악과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못하게 하시며, 오로지 진실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소서
저희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님을 알게 하시어, 진실된 마음으로 더욱 큰 희망을 갖도록 허락하여 주시고, 이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저희 안에 있음을 알게하시고, 오로지 당신의 거룩한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설득을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허락하시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허락하여 주소서
그러므로 진실로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소망을 주시며, 세상의 모든 권세와 악이라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거룩하고 크신 사랑을 보내주시는 주님의 크신 영을 알게 하시어, 그 크신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더욱 바르게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기도 안에서 주님과 세상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인내와 사랑을 배우도록 도와주소서
 

by whitechurch | 2009/11/13 19:57 | 정의의 느티나무숲 | 트랙백(1)

[옮김:위키]니케아신경

본글은 위키 한글백과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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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니케아 신경 또는 니케아 신조(Symbolum Nicaenum)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고백한 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팔레스타인 기독교 공동체의 세례 신경을 기초로 하여 '동질'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카에사리아의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오스의 신경을 기준으로 공포되었다. 이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며, 특히 성자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었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예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잘못된 교리에 대항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성찬예배시 니케아 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며, 서방교회와는 달리 성령성부로부터 나오신다고 고백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미사때 니케아 신경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되 사도신경으로 대체할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감사성찬례시 니케아 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며, 사도신경은 만도(저녁기도)에 사용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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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별 니케아 신경 고백내용 [편집]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편집]

+ 한 분이신 하느님을
◎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고개를 숙인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성공회 [편집]

나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시며,만물이 다 이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나이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음을 믿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며,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보편교회를 믿으며,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이부분에서 십자성호를 그어 성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경배를 표한다.-을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정교회 [편집]

신앙의 신조

  1.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2. 그리고 또 오직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3.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신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4.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5.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6.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7.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8.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께서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승과 같은 영광을 받이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9.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10.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11. 죽은 이들의 부활과
  12. 후세의 영생을 곧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영문 니케아 신경 [편집]

로마가톨릭 [편집]

I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the only-begotten, bor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Light from light, true God of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from the Holy Spirit and Mary the Virgin, and became man. He was also crucified for us under Pontius Pilate, and suffered and was buried. And He rose again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s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of His kingdom there will be no end. And in the Holy Spiri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who together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oke through the prophets.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profess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I expec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동방 정교회 [편집]

  • 미국 정교회 번역

I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Son of God, the only-begotten,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Light of Light, true God of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esse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and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of His kingdom there shall be no end. And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eth from the Father,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ake by the prophets.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I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age to come. Amen.

  • 그리스정교회 미국 대교구

I believe in one God,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Light of Light, true God of true God, begotten, not created, of one essence with the Father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He was crucified for us under Pontius Pilate, and suffered and was buried; And He rose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dead. His kingdom shall have no end. And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Creato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Who together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oke through the prophets.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I confess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I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age to come. Amen.

콥트교회 [편집]

  • 2001년 콥트교회 기도서(Book of the Divine Liturgies version (2001))

We believe in one God, God the Father, the Pantocrator [Coptic/Greek fo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all thing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the Father before all ages. Light of Light, true God of true God; begotten, not created; of one esse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of the Virgin Mary, and became man. And He was crucified for us under Pontius Pilat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on the third day He rose from the dea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scended into heaven, He sits at the right hand of His Father; and He is coming again in His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Yes,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ed and glorified; Who spoke by the prophets. And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confess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age to come. Amen

성공회 [편집]

  • 1662년판 성공회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version (1662))

I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his Father before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Ghos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sha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both the quick and the dead: Whose kingdom shall have no end. An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eth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spake by the Prophets. And I believe one Catholick and Apostolick Church. I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I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 1979년판 미국성공회기도서(Episcopal Church 1979 Book of Common Prayer version)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became incarnate from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 2000년판 영국성공회 기도서(Church of England Common Worship version (2000))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p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루터교회 [편집]

  • 2006년판 루터교회 기도서(Lutheran Service Book version (2006))

미국 루터교회 미주리 시노드(LCMS)와 캐나다 루터교회(LCC)에서 사용하는 루터교회 기도서(Service Book)

I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begotten of His Father before all worlds, God of God, Light of Light, very God of very God, begotten, not made, being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by whom all things were made;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was incarnate by the Holy Spirit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and was crucified also for us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and was buried. And the third day He rose again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ascended into heaven and sits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And He will come again with glory to judge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whose kingdom will have no end. An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and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is worshiped and glorified, who spoke by the prophets. And I believe in one holy Christian and apostolic Church, I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I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 of the world to come. Amen

교회일치를 위한 니케아신경 [편집]

  • 1975년판 교회일치를 위한 니케아신경(1975 ecumenical version)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one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he became incarnate from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ith the Father and the Son he is worshipped and glorified. He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by whitechurch | 2009/08/18 19:01 | 성공회 | 트랙백

[옮김:위키]39개 신앙조항

본 글은 위키 한글백과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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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성공회 39개 신앙 조항
(Thirty-Nine Articles)은 영국 성공회의 신학적 선언을 담은 문서로서 1556년 발표되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간의 종교분쟁으로 진통을 겪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종교통일령과 함께 개신교로마 가톨릭 간의 중용(Via Media)을 지키는 균형잡힌 종교정책이 실천되었다. 그중 하나가 캔터베리 대주교 매슈 파커가 작성한 영국 성공회 39개 신앙 조항으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19세기까지는 성직자옥스퍼드캠브리지대 교수와 학생에게만 동의 서명을 요구했을 뿐, 그외에는 이에 대한 강제적인 서명 요구는 없었다. 1865년부터는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도 성공회 기도서와 39개 신앙 조항에서 표현된 영국 성공회의 교리가 성서에 부합한다는 것에 동의하면 되었으며, 이전과 같은 동의 서명은 요구되지 않는다.

한편 미국 성공회의 경우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영국적인 상황에 기초한 항목들, 즉 제21조와 제36조, 제37조에 대해서는 변경 작업을 해서 1801년에 승인하여 받아들였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 신앙 조항이 가지고 있는 교회 일치에 대한 공헌점을 높이 사면서도 종교개혁기에 나타난 지나친 반목이 스며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성공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신을 이해했는지를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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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39개 신앙 조항의 내용 [편집]

제1조. 성 삼위일체 신앙에 관하여 [편집]

한 분이시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몸도 지체도 감정도 없으시며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을 가지시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자이시며 보호자이시다. 그리고 이 신성의 통일 속에서 하나의 본질과 능력, 영원성을 나누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니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제2조. 참 인간이 된 말씀, 하느님의 아들에 관하여 [편집]

성부의 말씀이신 성자는 영원하신 지극히 영원하신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성부와 함께 하나의 본질을 나누며 복되신 동정녀의 태에서 여인의 본질대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셨다.그리하여 두 가지의 온전하고 완전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 함께 참여하며 결코 나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성부와 우리들의 화해를 위하여 실제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원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제로 짓는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

제3조. 그리스도께서 음간에 내려가신 일에 관하여 [편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던 것처럼, 음간에 내려가셨음을 믿어야 한다.

제4조.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편집]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진실로 부활하셨고, 살과 , 그리고 완전한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진 몸을 다시 취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때까지 거기에 앉아 계신다.

제5조. 성령에 관하여 [편집]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참되며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은 본질과 권세, 영광을 가진다.

제6조. 구원을 위한 성서의 충족성에 관하여 [편집]

성서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읽을 수 없고 성서를 통해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은 어떤 사람에게도 신앙의 신조나 구원에 필요한 사상으로 요구될 수 없다. 우리는 성서라는 이름을 가진 구약과 신약의 정경들의 권위가 교회 안에서 결코 의심받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 정경들의 이름과 수
  • 창세기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 여호수아
  • 판관기
  • 룻기
  • 사무엘상
  • 사무엘하
  • 열왕기상
  • 열왕기하
  • 역대기상
  • 역대기하
  • 에즈라
  • 느헤미야
  • 에스델
  • 욥기
  • 시편
  • 잠언
  • 전도서
  • 아가
  • 대예언서 4권
  • 소예언서 12권

다른 책들은 (제롬이 말했듯이) 교회에서 생활의 모범과 행동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지만, 어떤 교리를 만드는 데도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 책들은 다음과 같다.

  • 에즈라 3서
  • 에즈라 4서
  • 토비트
  • 유딧
  • 에스델 잔서
  • 마카베오상
  • 마카베오하
  • 지혜서
  • 집회서(벤 시라 예수)
  • 바룩
  • 세 아이의 노래
  • 마나쎄의 기도
  • 수산나 이야기
  • 벨과 벰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은 모두 정경으로 인정한다.

제7조. 구약성서에 관하여 [편집]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와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옛날의 족장들이 현세의 약속만을 구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을 것이 못 된다.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그와 관련된 예식과 의식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지 않으며 그 정치적 규례도 모든 국가에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이른바 도덕적인 계명에 대한 순종에서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제8조. 세 가지 신경에 관하여 [편집]

니케아 신경아타나시우스 신경, 그리고 이른바 사도신경, 이 세 가지 신경은 철저하게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신경은 성서의 가장 확실한 보증으로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9조. 원죄, 즉 생득의 죄에 관하여 [편집]

원죄는 (펠라기우스파 사람들이 헛되이 말하듯이) 아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결함과 부패이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인간은 원래의 의로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본성상 악에 기우는 향이 있다. 그러므로 육은 항상 영에 거역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의 오염은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이스어로 ‘프로네마 사르코스’라고 하는 육의 욕망(어떤 이는 이를 육의 지혜로, 혹은 색욕, 애착, 욕망으로 해석한다)은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형벌이 없을 것이지만, 사도가 고백한 대로 색욕과 욕정은 그 자체로 죄의 본성이다.

제10조. 자유 의지에 관하여 [편집]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인 힘과 선한 행위로써 신앙과 하느님을 찾는 일에 자신을 돌이키거나 준비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질 만한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없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있고, 그 선한 의지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제11조.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에 관하여 [편집]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이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한 신앙으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업적과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신앙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에 관한 말씀에서 표현되듯이 가장 건전한 교리의 하나이며, 지극히 넘치는 위로가 된다.

제12조. 선행에 관하여 [편집]

선행이 비록 신앙의 결실이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후에 따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죄를 없앨 수는 없으며, 하느님의 엄정한 심판을 견뎌낼 수는 없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용납될 수 있으며,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에게서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치 나무가 열매를 통해 구별되듯이 선행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분명하게 알려지는 것이다.

제13조. 의롭다고 인정받기 이전의 행위에 대하여 [편집]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의 행위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이것으로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도 없으며,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듯이) 이에 적합한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신 것에 따라 된 것이 아니며, 결국 우리는 이러한 행위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제14조. 여분의 공덕에 관하여 [편집]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자발적으로 행한 일을 여분의 공덕이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반드시 교만과 불경건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가지고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요구되는 의무인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계명대로 다 행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제15조. 그리스도만이 죄 없으심에 관하여 [편집]

참된 인간의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지만, 그의 육신과 영혼은 죄에서만은 분명히 제외되셨다. 그는 흠이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단 한번의 희생제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죄가(요한이 말한대로) 그분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 외에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지만 많은 일에서 죄를 짓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우리 자신을 속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제16조. 세례 후에 지은 죄에 관하여 [편집]

세례를 받은 후 자의로 지은 중대한 죄 모두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며, 전혀 용서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회개의 여지가 있다. 성령을 받은 후에 우리가 주어진 은총에서 이탈하여 죄를 짓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므로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거나 참된 회개를 통한 용서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죄받을 것이다.

제17조. 예정과 선택에 관하여 [편집]

생명에 관한 예정은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 안에서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하느님은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에 따라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저주와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고, 고귀하게 만들어진 그릇인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고 지속적으로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목적에 따라 때가 차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은총을 통하여 부르심에 순종하며, 거저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며, 하느님께서 자녀로 받아 주신다. 이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되며, 경건하게 착한 일을 하며 살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믿음을 가지고 예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생각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달고 기쁘며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의 활동과 지상의 것들을 죽이고 그들의 마음을 높은 하늘로 들어 올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예정과 선택에 대한 생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될 영원한 구원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며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에 강렬하게 불붙여 주기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의심 많고 현세적인 사람들의 시각으로 하느님의 예정에 대한 선언을 계속해서 따르는 것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악마는 이런 사람들을 절망으로 떨어뜨리거나 절망과 다를 바 없는 가장 더러운 삶의 비참함으로 빠뜨린다.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된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제18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만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에 관하여 [편집]

모든 사람은 자신이 고백한 계명이나 종파에 따라 구원을 받으며 이에 따라 그러한 계명과 자연적인 빛에 따라 자기 생활을 맞추는데 부지런하면 된다고 말을 믿는 사람은 정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제19조. 교회에 관하여 [편집]

그리스도의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신실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며 성사들은 이에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성사가 올바르게 집행된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오키아 교회가 오류를 범했듯이 로마 교회도 행위와 예배 의식의 방법에서 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하였다.

제20조. 교회의 권위에 관하여 [편집]

교회는 예배의식을 결정할 힘과 신앙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에 모순된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고, 성서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모순되게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비록 거룩한 말씀의 증인이며 보존자이지만 성서에 반하는 어떤 법령도 포고해서는 안되며, 성서 밖의 것을 가지고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강제로 믿게 해서도 안 된다.

제21조. 총회의 권위에 관하여 [편집]

총회는 제후의 명령이나 의지 없이는 소집될 수 없다. 소집된 총회(이 모임은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다스리는 것은 아닌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하느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때로 오류를 범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총회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제정한 것이 성서에서 근거한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힘도 없고 권위도 없다.

제22조. 연옥에 관하여 [편집]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제23조. 교회의 사목에 관하여 [편집]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아 회중 안에서 공적인 설교나 성사를 집전하도록 파송받기 전에 이러한 직책을 수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고 파송 받은 사람이, 회중 안에서 주님의 포도원으로 사목자들을 부르고 파송할 수 있는 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에 의해서 이 일을 위하여 선택받고 부름받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제24조.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의 사용에 관하여 [편집]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교회 안에서 공적인 기도를 드리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과 초대 교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다.

제25조. 성사에 관하여 [편집]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에 대한 징표요 표시일 뿐만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선하신 뜻에 대한 효과적인 표시이다.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에 활력을 주고 굳세게 하며 견고하게 한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두 가지인데, 세례와 주님의 만찬이 그것이다.소위 다섯 가지 성사라고 말하는 견진, 고해, 신품, 혼배, 조병성사는 복음서에서 말하는성사에 포함되지 않으며, 부분적으로 사도들을 잘못 모방한데서 나타났으며, 부분적으로 성서에서 허용하고 있는 관습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와 주님의 만찬과 같은 성사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가시적 표시나 의식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조배하거나 들고 다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성사는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효과와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를 무가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 벌을 초래하는 것이다.

제26조. 성직자의 품성 결함이 성사의 효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편집]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악한 사람과 성한 사람이 섞여 있고, 때로는 악한 사람이 말씀과 성찬을 집전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위임과 권위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집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것의 효과가 이들의 사악함 때문에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도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이 성사를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악한 사람이 집전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사목자를 심문하여 그의 잘못을 아는 사람들의 고발에 따라 결국 유죄가 입증된다면, 면직시키는 것이 교회의 치리에 합당하다.

제27조. 세례에 대하여 [편집]

세례는 신앙고백의 징표이며,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거듭남과 새로운 탄생의 징표이다. 이 징표를 도구로 하여 세례를 올바르게 받은 사람은 교회에 결합되며, 죄의 용서와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자녀로 받아들여진다는 약속이 가시적으로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나며 보증을 받는다. 그리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통하여 신앙은 굳어지며 은총이 더해진다. 유아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것에 가장 잘 조화되는 것으로서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

제28조. 주님의 만찬에 대하여 [편집]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이루어야 할 사랑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성사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합당하게, 또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떼는 빵을 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안에서 화체(즉 빵과 포도주의 실체의 변화)가 된다는 주장은 성서에서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의 분명한 말씀에 위배되며 성사의 본질을 버리고 많은 미신의 여지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성찬에서 오직 천상적이고 영적인 방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며 받아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길은 바로 신앙이다. 주님의 만찬의 성사, 즉 성체와 보혈은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르면 보존하거나 여기저기 들고 다니거나 들어 올리고 경배하는 대상이 아니다.

제29조. 불경한 사람이 주님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편집]

불경건한 사람과 분명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육체적으로 가시적으로 입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성사를 댄다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나누어 먹은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이렇게 위대한 성사와 그 표지를 먹고 마시는 것이 그에게는 벌을 초래한다.

제30조. 이종배찬(二種陪餐)에 관하여 [편집]

주님의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성사의 두 부분 모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같이 배찬되어야 함을 그리스도가 제정하시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제31조. 십자가 위에서 끝난 그리스도의 한번의 제물에 관하여 [편집]

단 한번 이루어진 그리스도 자신의 봉헌은 원죄와 실범죄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죄를 위하여 행하신 완전한 속죄이며, 화해이고 변상이다. 그리고 이 밖에는 죄를 보상할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른 바 미사를 희생제의로 보고 사제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고통과 죄를 덜기 위해 그리스도를 봉헌했던 것은 불경하게 지어낸 이야기이며 위험한 기만이었다.

제32조. 사제의 결혼에 관하여 [편집]

하느님의 법은 주교사제부제가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거나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혼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더 낫다고 판단한다면 결혼 또한 정당한 것이다.

제33조. 파문된 사람을 피하는 것에 관하여 [편집]

교회의 공개적인 선언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서 정당하게 제외되고 파문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회개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화해하여 교회의 권위에 따라 교회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이방인과 세리 취급을 받아야 한다.

제34조. 교회의 전통에 관하여 [편집]

전통과 예배 의식은 반드시 어디에서나 한가지이거나 똑같을 필요가 없다. 모든 시대에 걸쳐 전통과 예배 의식은 다양했기 때문이며, 나라와 시대와 사람들의 관습의 다양성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어 제정할 수는 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적인 판단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 없는 교회의 전통과 예배의식을 공공연히 파괴하는 행위, 즉 교회의 공적인 질서에 반대하고 교회 재판소의 권위를 해치며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공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두려워할 것이다).

제35조. 교리서에 관하여 [편집]

제2교리서는 그 내용의 제목을 이 조항에 부기하여 두거니와, 에드워드 6세 때 발행된 제1교리서와 같이 하느님께 합당한 전체적인 교리를 담고 있으며, 이 시대에 필요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이 이를 충실하고 명확하게 읽어 주어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 교리서의 내용
1. 교회의 올바른 이용에 대하여
2. 우상의 위험에 반대하여
3. 교회의 수리와 청결 유지에 대하여
4. 선행, 특별히 단식에 대하여
5. 과식과 과음에 반대하여
6. 지나친 치장에 반대하여
7. 기도에 대하여
8. 기도의 장소와 시간에 대하여
9. 반드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한 공동 기도와 성사에 대하여
10.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에 대하여
11. 구제 활동에 대하여
12.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13.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14.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15.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를 올바르게 받는 것에 대하여
16.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17. 기원절(공도재)에 대하여
18. 결혼생활의 상태에 대하여
19. 회개에 대하여
20. 태만에 반대하여
21. 반란에 반대하여

제36조. 주교와 성직 서품에 관하여 [편집]

에드워드 6세 때에 발행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은 대주교와 주교의 축성 및 사제와 부제의 서품식 예식문은 축성과 서품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예식문에는 미신적이거나 불경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앞에서 말한 에드워드 왕 제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도서의 의식에 따라 축성되고 서품되었으며, 이후에도이와 같은 의식에 따라 축성되고 서품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축성되고 서품을 받은 모든 성직자를 올바른 질시에 따라 정당하게 축성받고 서품받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제37조. 시민 통치 권력에 관하여 [편집]

왕은 영국의 영토와 그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지역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 이 영역에 속하는 재산에 대해서 최고 지배권은 교회와 시민 권력을 불문하고 외국의 치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왕권에 최고의 통치권을 부여한 이상, 이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는 이들의 생각은 과오를 범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우리는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를 집전을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에 관하여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발표한 최근의 칙령이 가장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경건한 모든 왕들에 대하여 하느님 자신이 늘 부여하신 독자적인 특권이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을 주어 맡긴 모든 재산과 계급을 교회의 것이든 아니든 통치하며, 또 다스릴 때에 국가의 권력을 가지고 완고하고 악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의 주교는 영국 영토 안에서 어떤 치리권도 갖지 못한다. 영국 영역을 지배하는 모든 법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악하고 중대한 범죄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정당하다.

제38조. 그리스도인의 재산은 공유물이 아님에 관하여 [편집]

그리스도인의 부와 재산은 그 권리와 명칭과 소유에서, 재세례파 사람들이 거짓되고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공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소유물을 가지고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어야 한다.

제39조. 그리스도인의 맹세에 관하여 [편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야고보께서 우리의 공허하고 경박한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사랑을 위하여 통치자가 맹세를 요구할 때는 맹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언자들의 교훈에 따라서 정의와 올바른 판단과 진리로 맹세해야 한다.

참고문서 [편집]

  • "성공회 39개조 신앙 조항" 해설 및 번역 / 주낙현 신부 (대한성공회)

by whitechurch | 2009/08/18 18:46 | 성공회 | 트랙백(1)

[옮김:위키]존 웨슬리(rev.John Wesley)

본 글은 위키 한글백과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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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rev.John Wesley, 1703년 ~ 1791년)는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성공회 신부이다. 성공회감리교에서는 그의 회심일인 5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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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성장 과정 [편집]

1703년 7월 17일 링컨셔 주 에프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Rev.Samuel Wesley)의 아들로 태어났다. 새뮤얼 웨슬리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였으며,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 만큼 빈틈없는 학문 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아이들이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1]

신학생 시절 [편집]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 노래,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2], 성적도 우수하였다.

복음주의 운동 [편집]

존 웨슬리는 1725년 성공회 부제서품 받았으며, 1726년 링컨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존 웨슬리 부제는 중세 영성가 토마스 아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어 하느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728년 9월 성공회 사제로 서품 받은 존 웨슬리는 1729년 옥스퍼드대학교에 돌아와서, 동생 찰스 웨슬리(1707년 12월 18일생)가 결성해 놓은 Holy Club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청중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신학생 시절 신학과 웅변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마르틴 루터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회심후 그는 1739년 브리스톨에서 감리교회를 창설하였으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성공회 신부로 남았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존 웨슬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민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한다.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로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고,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성공회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3]

신학 [편집]

존 웨슬리는 개인적 회심, 철저한 신앙생활, 예전(Liturgy)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전적 신앙생활의 회복,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4],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복음전파, 거듭남의 은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각주 [편집]

  1. 《기독교교육》2008년 6월호,기독교교육과 신학-복음주의 부흥운동가,요한 웨슬레,배성산, 대한기독교교육협회
  2. 대구성서아카데미 칼럼-신완식의 런던이야기
  3.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우리》/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136
  4.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by whitechurch | 2009/08/18 18:41 | 성공회 | 트랙백

[옮김:위키]성공회 소개

본 글은 위키백과 한글판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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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성공회 공동체
(The Anglican Communion) 또는 성공회(聖公會, 영어: 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는 전세계 160여 개국, 38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로 이루어진 기독교 교파이며 신자는 약 7000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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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명칭 [편집]

성공회(聖公會)는 한자문화권인 중국, 일본, 한국에서 사용하는 교회이름으로, 사도신조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한자로 옮긴 이름이다.[1]

성공회의 정체성과 등장 배경 [편집]

성공회의 정체성 [편집]

성공회는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2]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성공회의 등장배경 [편집]

흔히 성공회에 대해 영국 헨리 8세의 혼인무효 문제와 관련하여 교황과 생긴 불화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형성한 교회라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많으나, 헨리 8세의 혼인무효논쟁은 영국 종교개혁정치적인 계기였을 뿐,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성공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고유성격를 형성하였다. 예를 들어 에라스무스(Erasmus)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자 윌리엄 틴데일(W.Tyndale)의 영문 성서 번역 등과 더불어, 당시 타락한 로마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여러 종교개혁 운동은 성공회가 종교개혁 전통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헨리 8세는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가 보편교회(the universal church)의 지역적인 표현이라고 여겼다. 이는 교황권 지상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이며[3], 종교개혁교회 이해 원칙이기도 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치세 당시 영국 성공회에는 여전히 중세의 예배양식들이 남아 통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지역 교회의 자치와 독립이라는 원칙은 이후 영국 성공회의 변화와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성격형성에 큰 힘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후 성공회는 에드워드 6세(1547년-1553년)와 엘리자베스 1세(1558년-1603년)당시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고유성격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리적·신학적 정착의 주춧돌은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와 성공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한 신학문서인 영국 성공회 39개 신앙 조항(The Thirty-Nine Article of Religion)이다. 성공회 기도서는 영국 국민들이 이전의 어려운 라틴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영어로 예배드리는 종교개혁의 원천이 되었으며, 영국 성공회 39개 신앙 조항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지적하는 동시에, 개신교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반대급부의 편향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이로써 성공회는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 노선 즉,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사이의 극단을 피하는“중용”(via media) 노선을 걷게 되었다.[4]

세계 성공회공동체 [편집]

근대 성공회는 대영제국식민지 건설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영국성공회(Church of England)에서 세계 성공회공동체(the Anglican Communion)로 발전하는 두 단계의 과정을 겪는다. 그 첫단계는 17세기 영국식민지 정책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에 퍼지는 단계이다. 18세기에 이르러서 두 번째 단계가 펼쳐지는데 이때 성공회는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성공회의 선교적 노력이 낳은 결과였다.

세계성공회공동체(the Anglican Communion)에 속한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교회는 교회가 위치한 나라에 속해 있다는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교회로 성장해 갔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역사적 기원과 신학적 이해를 공유하는 하나된 교회의 인식을 강화하고 세계성공회공동체의 당면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램버스 회의(the Lambeth Conference)를 약 10년마다 열어 모이고 있다. 람베스 회의는 강제적 권한을 가진 법적 기구가 아니라 협의체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일치의 한 상징일 뿐 치리 권한을 갖지 않으며 각 나라의 성공회들은 동등한 자치적인 권한을 갖는다. 1888년 람베스회의에서는 세계성공회공동체뿐만 아니라 전세계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신앙적 기준을 마련했는데 이는 기독교의 기본 신앙 선언을 함축하고 있다.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the Lambeth-Chicago Quadrilateral, 1888년)이라 불리는 이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구약성서신약성서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2.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니케아 신경기독교 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3. 세례성사성찬례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Sacrament,성례전)이다.
  4. 역사적 주교직(the historical episcopate)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치리 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람베스 회의의 발전 속에서 거듭된 관심사는 지역 관구 교회의 독립성에 대한 인정과 교회의 일치에 관한 것이었다. 모순되는 듯한 이 해결책을 람베스 회의와 세계성공회는 “가시적 친교”라는 소명 속에서 “교제”(fellowship)와 “상호 친교”(intercommunion), 그리고 “상호 책임”(mutual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이를 위해 구체적인 협의 기구를 형성하여 일치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성공회는 1867년부터 1998년까지 모두 13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하여 세계 성공회의 일치와 개신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정교회 등 다른 전통 교단들과의 교제와 일치 등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 특징은 가시적이고 포용적인 태도, 민족적이고 자치적인 태도, 그리고 일치를 지향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는 이러한 신학적 태도와 교회 이해에 기초하여 20세기 중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교회일치운동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한편 21세기에 있어, 미국, 캐나다 성공회동성애자에 대한 서품허용논쟁과 여성주교서품 등을 둘러싼 세계 성공회 공동체(the Anglican Communion) 내부의 신학적 문제와 함께 조지 부시가 미국 보수 기독교계의 지원으로 미국 대선에서 승리할 정도로 막강한 종교적 보수정치세력(기독교 우파)이 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이를 반대하는 아프리카 성공회와의 갈등도 존재한다.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다른 개신교회교파들과는 달리 성공회는 획일성과 강요가 아닌 토론과 관용을 통해 교회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는 입장(성공회 용어로 모호성)에 따라,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와 교리의 범위를 명시적으로 정하지 않았다. 이에 동성애, 여성 주교직 선출 등에 대한 각 국가 성공회의 입장은 각 국가의 사회 문화 정치현실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며 따라서 성적 소수자와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미국과 캐나다 등과 다른 국가들간의 입장 차이는 크다. 성공회는 표면적으로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가 세계성공회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개별 국가들의 성공회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관구교회들이기 때문에 지역 국가 교회의 이탈이나 교리 해석상의 변경을 내부 조절하기 위한 권위가 사실상 부재하다. 갈등은 주로 아프리카 성공회 교회들로 구성된 소위 글로벌 사우스 그룹과 북미의 미국, 캐나다 성공회간에서 발생하고 있다.

성공회의 세 흐름 [편집]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교회이다. 우선 18세기에 흥성한 복음주의자들, 이른바 저교회파(Low Church) 사람들은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회심, 성서의 최우위성, 복음의 설교에 강조를 두었으며, 신앙에 의한 의인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일어난 옥스퍼드 운동은 사도적 계승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과 성사적 신앙에 대해 강조했다. 고교회파(High Church)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세속 사회의 급진주의와 비종교적 사고의 위협에 닥치자 다시금 질서와 권위에 대해 강조하면서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예전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다른 축으로 성서비평학과 신학적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광교회파(Broad Church)의 경향을 형성하여 신앙의 본질과 권위를 협소하게 이해하는 이상의 다른 태도들을 비판하고, 복음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적응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성공회 내의 이러한 다양한 전통은 서로에게 신학적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여러 모습으로 지금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태도의 다양성은 성공회의 전통을 분열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성공회의 신학과 정신의 풍요로움에 기여하고 있다.

성공회 신앙의 세가지 기준 [편집]

성공회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권위에 대해서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즉 기독교 신앙을 판단하는 권위를 세 가지 기준(code)을 통해 세웠던 것이다. 성서와 이성과 전통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기준은 성공회의 역사적 발전과 관련이 깊다.

성서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다. 즉 전통을 통해 굳어진 실체를 진리로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과 진리의 회복으로서 종교개혁이 존재하는데, 그 비판과 회복을 위한 최우선의 권위가 바로 성서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성서의 권위는 전통과 교리에 빗대어 신학적 궁극성이나 절대적 원리를 내세우는 모든 주장을 상대화하려는 비판적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내적 성찰을 위하여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성서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로지 성서로만”이라는 원리에도 약점은 있다. 즉 역사적인 발전을 간과하여 환상적인 원리적 신앙을 추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러한 환상을 피하기 위한 인간 이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해석자의 자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판단하는 이성(cosmic and corporate Reason)이다. 또한 이성은 전통보다 앞선다. 전통은 이성을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성의 역할은 합일이 이루어지는 원칙을 제공한다. 이성은 인간의 경험을 사물의 본질과 조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성서에 담긴 계시는 특정한 역사와 조건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역사 속에서 재해석되려면 이성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전통은 인간의 경험과 실천, 그리고 합의가 최종으로 만들어 낸 교회의 공동체적인 산물로서 교회의 중요한 권위이다. 즉 성서에 대한 이성적 작업으로 축적된 신앙의 결과물이 바로 전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의해 제공된 것에 종속되어야 한다. 전통은 성서에 속한 초자연적인 최고 진리를 가져다 줄 수 없지만, 개인적 판단의 위험성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통은 성서와 이성에 근거한 인간의 “실천, 경험, 동의”에 의해서 필요에 따라서 변경되고 폐지될 수 있다. 성공회는 이렇게 성서와 이성과 전통의 긴장 관계를 통해서 교회사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주장과 오류를 피하는 “중용”의 정신을 구현해 왔다.

by whitechurch | 2009/08/18 18:32 | 성공회 | 트랙백

[옮김:다음 백과사전]크랜머(Cranmer, Thomas)

본 글은 다음 백과사전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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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캔터베리 대주교(1533~56),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고문.
개요
대주교로서 관구교회로 하여금 영어성서를 사용하게 했고, 〈성공회 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 초안을 작성했으며, 오늘날도 쓰이는 호칭기도서(litany)를 썼다(→ 영국국교회, 성공회, 개신교, 종교개혁, 로마 가톨릭교). 프로테스탄트를 장려했다는 이유로 가톨릭교 여왕인 메리 1세에게 폐위당한 뒤 이단으로 단죄되어 화형당했다.

초기생애

토머스 크랜머와 애그니스(결혼 전 성은 해트필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젠트리 하층에 속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재산이 장남 존에게 물려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랜머와 동생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엄하고 가혹했던 교장'에게 배웠는데, 훗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에게 배우는 동안 불안정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성격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1503년 소년 크랜머는 케임브리지로 갔다. 1510(또는 1511)년 지저스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으나, 돌핀 기숙사 여주인의 친척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 기간 동안 아내를 돌핀 기숙사에 남겨둔 채 버킹엄(훗날의 마그덜리너) 칼리지에서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환경 때문에 훗날 그가 여관 마부로 생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러나 아내는 출산 도중에 죽었고, 그뒤 지저스 칼리지로부터 특별연구원 직위를 다시 받았다. 이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 비록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폭넓은 지식을 갖춘 당대에 손꼽히는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520년경부터 루터의 반란으로 제기된 신학문제들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하는 학자들 모임에 가입했다.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작은 독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훗날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게 될 이 모임에는 윌리엄 틴들, 로버트 바니스, 토머스 빌니, 크랜머가 있었는데, 그는 1525년 무렵 대표기도 때 잉글랜드에서 교황권을 폐지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왕을 도와 일함

일찍이 개혁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교육 배경 및 취향과 맞지 않던 정치 사건들에 휘말려 드는 일이 없었다면 그 열망은 학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1527년부터 헨리 8세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첫번째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와 이혼을 추진했는데, 1529년 그 '이혼'이라는 수레바퀴에 크랜머도 말려들게 되었다. 그해 8월 땀을 흘리는 병으로 알려진 전염병이 잉글랜드를 휩쓸었고, 케임브리지에서는 더욱 심했다.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서 크레시라는 두 형제(이들은 어머니를 통해 크랜머의 제자가 되었음)와 함께 케임브리지를 빠져나와 에식스 월샘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때 왕이 그 근방을 방문하고 있었다. 곧 왕의 고문관인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워드 폭스는 왕의 임시숙소에서 크랜머를 만나 왕이 계획하고 있는 이혼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과거에는 죽은 형의 미망인과 혼인하는 것이 적법한 일인지 교회법학자들과 대학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그는 왕이 그런 결혼을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표시했고, 이 문제에 대해서 국내 신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것을 주장했다.
아무리 무명인사라 할지라도 뛰어난 두뇌와 행동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도움을 받고 싶어하던 헨리는 크랜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본 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자신의 이혼문제에 전념하라고 명령했다. 크랜머가 받은 임무는 왕의 계획을 진술하고 그것을 성서, 교부들의 가르침, 여러 공의회의 법령에 근거하여 옹호하는 방식으로 왕의 입장을 선전하는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왕의 소개로 윌트셔의 백작인 앤 불린 아버지의 환대를 받았고, 한동안 더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지냈다. 그뒤 톤턴의 대부제로 임명되었고, 왕의 전속사제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교구의 성직록도 받았다. 논문을 완성한 뒤 옥스퍼드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로부터 그 내용을 변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처음에는 대부분 그의 논지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나, 그가 자리를 뜨자 결국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는 이미 고등법원은 아닐지라도 영향력이 컸던 법정에서 왕을 변호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있었다. 윌트셔 백작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이 1530년 로마로 파견되었고, 크랜머는 이 사절단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잉글랜드의 내사원장(內赦院長)에 임명되었으나, 이혼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532년 독일 황제 카를 5세에게 공식사절로 파견되었으나, 이때 받은 임무는 루터파 제후들과 관계를 트는 것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를 사귀었는데, 신중한 성품의 크랜머는 루터와 이전의 정통 신앙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의 신학 견해가 마음에 들었고, 또한 그의 조카 마르가레테는 오랫동안 원하지 않던 독신생활을 해온 그의 마음에 훨씬 더 강하게 와 닿았다. 크랜머는 사제였는데도 1532년 그녀와 결혼했으며, 이때부터 신학 견해도 개혁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1532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해였다. 그해 8월 연로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럼이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국왕의 수입증대를 위해 관례대로 한동안 공석을 유지했으나, 그해말에는 이혼문제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공석으로 둘 수 없게 되었다. 마침 토머스 크롬웰이 교회문제담당 수석고문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더욱 강력한 정책이 예고되던 상황에서 1533년 1월에는 로마에 항소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 초안이 작성되고 있었고, 앤 불린은 임신중이었다. 유력한 대주교 후보였던 스티븐 가디너가 신망을 잃자 왕은 크랜머를 선택했다. 1533년 3월 크랜머는 교황으로부터 승인칙서를 받고 순종서약을 한다고 선언한 뒤 축성을 받고 캔터베리 대주교로 즉위했다. 그뒤 왕이 기대하던 일을 수행해 가는 가운데 5월 던스터블에서 재판을 열어 왕이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한 결혼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공포한 다음 앤 불린과의 재혼은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1536년 이번에는 앤이 간통을 저질렀다는 모호한 증거를 사실로 인정하고서 그 결혼을 무효로 공포했고, 1540년 헨리 8세가 4번째 아내 클레비스의 과 이혼하는 일을 도왔으며, 1542년 캐서린 하워드를 반역성 간통죄로 처형하기로 한 재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크랜머는 위와 같은 많은 논란을 빚은 쟁점들에 대해서 분명히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했겠지만, 나타난 결과를 보면 어쨌든 왕의 지시대로 그 결혼정책을 수행해나간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재조직된 교회에서 대주교로서 행한 활동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출세를 꿈꾸지는 않았다. 대주교로 승진하기 직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은 성직자로서 출세를 꿈꾸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로, 만일 출세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인정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던 아내는 장애물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1548년 전까지는 아내를 공개적으로 밝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내를 공기구멍이 있는 궤 속에 넣어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생긴 천박한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권좌에 앉게 되자 그 결과들을 피할 수 없었다. 대륙의 신학적 변화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확신에 찬 종교개혁자였던 그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주인 밑에서 영국국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크롬웰과 협력하여 영어성서 발행을 장려했고, 1538년에는 크롬웰의 강제명령으로 교구들에 영어성서 사용을 의무화했다(→ 성서번역).
이미 헨리 8세가 죽기(1547) 전부터 크랜머는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고, 1545년 잉글랜드 개혁교회를 위해 호칭기도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그가 남긴 걸작들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까지도 쓰인다. 1538년에는 이미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說: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외형으로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본질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을 단념했으나,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실재로 임재한다는 신앙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미 1536년 북부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를 주도적인 혁신자로 인정했다. 따라서 1539년에 성직자 결혼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화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6개 조항이 공포되고, 1540년 크롬웰이 실각하자 크랜머는 매우 불편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헨리의 말년에 크랜머의 적들은 적어도 3번이나 그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제거하려고 치밀한 음모를 꾸몄지만, 그때마다 헨리가 이상할 정도로 그를 감싸주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헨리는 왕으로서 신하들과 고문들에 대해 철저히 개인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크랜머에 대해서만큼은 신뢰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대주교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탐욕스럽거나 교활하지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았고, 왕의 총애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홀로 변호했으며(비록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토머스 모어 경, 앤 불린, 토머스 크롬웰, 그외 사람들을 위해 탄원했음), 기적적으로 헨리의 총애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왕은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을 대할 때 생기는 외경심과 즐거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대했다. 그를 좋아하고 그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감싸주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헨리가 임종 때 그에게 의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6세 때의 업적

에드워드 6세
(헨리가 3번째 부인 제인 시모에게서 낳은 외아들)가 즉위함과 동시에 크랜머의 때가 찾아왔다. 어린 왕의 후견인 서머싯의 공작 에드워드 시모는 처음부터 영국국교회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꾸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1549년 그가 실각했을 때 예상되던 가톨릭의 반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모를 축출한 존 더들리(훗날 노섬벌랜드 공작이 됨)가 훨씬 더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펼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필요했던 교리작업에서 크랜머는 앞장서서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1547년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성직자들이 설교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악평 섞인 불만에 대처하기 위해 〈설교집 Book of Homilies〉을 펴냈다. 1549년 온건한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띤 최초의 기도서를 펴냈고, 1552년 더욱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밝힌 2번째 기도서를 펴냈다. 이 작업의 많은 부분을 직접 맡아서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외국 신학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잉글랜드는 이들에게 마치 자석과도 같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마르틴 부처로, 그의 성찬에 관한 견해는 특히 2번째 기도서의 성찬식 부분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크랜머를 설득하여 1547년까지 지켜온 루터주의에서 탈피하게 만든 사람은 부처라기보다는 폴란드의 소(小)얀 라스키이거나 잉글랜드인 니콜라스 리들리였는데, 이 두 사람은 대주교보다 더욱 단호하고 망설이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대에 크랜머는 당대의 종교논쟁에 대한 영국국교회의 교리 입장을 규정짓는 교리진술서인 42개조(1553)를 공포했다. 모든 성직자, 교수, 학위취득 신청자들은 의무적으로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 문서는 훗날 39개 조항으로 줄었고, 영국국교회에 의해 정식 채택되었다.
또한 이무렵 크랜머는 영국국교회의 교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다가 1571년 〈교회법 개정 Reformatio Legum Ecclesiasticarum〉으로 출판되었다. 당시까지도 국가행정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그는 학문·권위·성실함으로 국가의 혁명을 주관하고 이끌었다. 또한 영국국교회의 교리·의식·법을 정착시켰다. 무엇보다도 영국국교회는 그 덕분에 아름다운 전례서를 갖게 되었는데, 이 전례서를 통해 그가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단재판

에드워드 6세의 임박한 죽음(1553. 7)은 마침내 크랜머를 정치에 말려들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거부하다가 죽음을 목전에 둔 왕의 강요에 못이겨 노섬벌랜드가 왕위계승권을 메리 공주(헨리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서 낳은 딸)에게서 자신의 며느리이자 헨리의 종손녀인 제인 그레이 부인에게 넘기기 위해 관례, 성문법, 헨리 8세의 유언을 변경할 계획으로 작성한 문서에 서명했다. 제인 그레이 부인은 여왕으로 선포되었지만 9일 만에 폐위당했고,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크랜머는 반역죄로 고소당하고, 1553년 11월 메리 정권에게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도 이미 그에게는 더이상 밝은 전망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메리의 즉위로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한동안 무너져내렸다. 크랜머의 철저한 원수 스티븐 가디너가 즉시 감옥에서 풀려나 대법관이 되었고, 1554년 11월 추기경 레지널드 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여 이단 처형을 지휘했다.
크랜머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운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여왕과 고문들은 노섬벌랜드의 어리석은 음모를 지원했다는 기술적인 죄를 가지고 그를 처형할 마음이 없었고,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교도를 장려해온 이유를 가지고 처형하려 했다. 이들은 의회에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법령들을 철회하게 하고, 국왕의 군대가 이단들에 대해 화형을 집행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을 다시 도입하게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크랜머는 리들리와 과거 우스터 주교를 지낸 프로테스탄트교도 휴 래티머와 함께 1554년 3월 자신의 대학교보다 반종교개혁에 대한 반발이 적었던 옥스퍼드로 이송되었다. 그해말 이단에 대한 법령들이 채택되었고, 1555년 9월 오랫동안 감옥생활로 몸이 쇠약해진 크랜머는 오래 계속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재판에서 성사(聖事)와 교황권에 대한 과거의 입장에서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벗어났다는 고소에 대해 단호히 자신을 변호했다. 여러 절차를 거친 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론이 내려졌고, 1556년 2월 14일 그를 모욕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의식에서 대주교 및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결국 당국에 넘겨졌다.

순교

그러나 메리 정부는 그를 쉽게 처형하지 않았다. 이단의 괴수를 화형에 처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자인하게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꺾으려 했다. 전 해 10월 크랜머는 리들리와 래티머의 순교장면을 강제로 지켜본 바 있는데, 이제 정부당국자들은 그를 잠시 감옥에서 쾌적한 환경으로 옮겨 놓은 뒤 과거의 자신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크랜머는 이른바 철회서라고 하는 5개의 문서들에 서명했는데, 그중 처음 4개 문서는 잉글랜드 사람이면 누구나 과거에 왕과 의회가 법령으로 포고한 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자신의 일관된 신념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국자들은 이러한 그의 신념을 이용하여 메리의 반종교개혁의 유효성을 논리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크랜머가 반종교개혁을 인정한 데에는 허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사형이 연장되고 있고 또 혹시 사면받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이 분명히 작용했으며, 이런 희망을 가지고 마침내 굴욕적으로 자신의 신앙 경력을 철회(6번째)하고 말았다.
정부는 크랜머의 변절 선언이 잉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었다. 크랜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가디너가 죽었는데도 메리 여왕과 폴 추기경은 반드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결과 1556년 3월 21일 크랜머는 화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직전에 대중 앞에서 철회사실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안 그는 믿음과 위엄을 되찾았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고, 다만 영혼의 평안만 얻으면 되었기에 철회사실을 부인한 뒤, 교황의 권력은 그리스도에게서 찬탈한 것이며 화체설은 거짓이라고 강력히 재천명함으로써 적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크랜머는 정부가 선전활동을 통해 이룩한 모든 것을 단숨에 허물어뜨렸고, 살아남아 있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용기를 되찾아주었다. 그런 다음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잘못된 철회서에 서명함으로써 '죄를 지은 오른손'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끝까지 치켜든 채 죽었다. 그의 용감하고 위엄에 찬 최후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가

크랜머는 매우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그처럼 많은 시련과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악평을 받아왔다. 본질상 학자였던 그는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들에게 집요함과 열정을 주입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때때로 그는 도덕 관념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그가 마지막에 의심을 가졌던 것은 고문으로 교묘히 주입된 것이며, 종교개혁 기간 동안 대대로 내려온 정통신앙에서 점점 분명하게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발전해간 사실은 충동보다는 이성에 순응한 그의 신앙 경력을 잘 보여준다. 크랜머는 언제나 배우는 태도를 취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위성직을 꿈꾸지도 않았고, 고위성직자가 된 다음에도 그 직위를 향유하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 직위가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다. 자기를 중상하는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거나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한번은 크롬웰이 화를 내면서 '교황의 깡패들'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눈과 목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크랜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그 예언을 일축했다.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하던 시절에 요안 보처의 재판과 화형(1550)에 가담한 것을 제외하고는 박해에 관여하지 않고 관대한 태도를 유지했다. 요안 보처가 단죄당한 이유도 아리우스주의와의 투쟁이 끝난 이래 모든 교회가 용납할 수 없는 죄로 간주해온 삼위일체에 대한 부정과 노골적인 신성모독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크랜머는 교회의 권위를 크게 존중했는데, 이를테면 그가 개정한 교회법에 그런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종교적 신념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비록 국가를 숭배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가끔 제기되는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입장 때문에 왕 앞에서 굽신거리지는 않았다. 헨리 8세의 고문들 가운데 오직 그만이 왕의 총애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변호했으며, 1543년 '왕의 책'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을 때 왕의 신학과 문법을 신랄히 비판한 사실은 그의 용기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섬벌랜드 앞에서 기가 죽어 있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용감하게 대항했다. 이상의 사실들은 그가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참으로 교리적인 신조로 여겼다는 사실을 강조해준다. 이런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관성이 있었지만, 그것은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던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 것일 뿐이었다. 그를 인도한 또하나의 별은 신학연구였다. 신학연구에 있어 중세말 스콜라주의의 무미건조한 영향을 떨쳐버리고 대신 성서와 초기 교부들을 연구했다. 그는 왕이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믿었으며, 이로써 당대의 전형적인 영국국교도, 즉 영국의 개혁파 교회의 지적이며 영적인 설립자이자 조상이 되었다.
G. R. Elton 글

by whitechurch | 2009/08/14 12:31 | 성공회 | 트랙백

International New Venture

McDougall & Oviatt(1994)이후 창업직후 신속하게 국제화하는 중소규모의 벤처기업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Knight & Cavusgil(1996)의 경우 유사한 개념으로 'Born Globals'라는 표현을 하용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학자들이 각기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특징은 창업직후 문화적 경계 혹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고 해외시장을 기업의 주력 시장으로 인식하여, 다양한 국가에 걸쳐 매출을 일으키고, 경쟁우위를 창출하는 기업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현재 INV(International New Venture)에 대한 연구는 McDougall & Oviatt(1994, 1995, 1996, 1997, 2000), McDougal et al.,(2003),  Knight & Cavusgil(1996, 2004), Moen(2002), Moen & Servais(2002), Mudambi & Zahra(2007), Zhou et al.,(2007), Zuchalle(2002), Jones(2004), Rialp et al(2003, 2005),Oviatt & McDougall(1994, 1997), Rennie(1993), Coviello & Jones(2004), Zahra & George(2002),Bloodgood, Sapienza & Almeida(1996), Burgel & Murray(1998), Madsen & Servais(1997), Madsen et al.,(2000), Roberts & Senturia(1996), Autio et al.,(2000), Servais & Rasmussen(2000) 등의 연구를 통해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각 연구자들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동일한 기업 개념에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Born-Globals (Rennie, 1993; Knight and Cavusgil, 1996; Madsen and Servais, 1997; Aspelund and Moen, 2001; Sharma and Blomstermo, 2003; Gabrielsson and Kirpalani, 2004), International New Ventures (McDougall et al., 1994, 2003; Oviatt and McDougall, 1994, 1997), High Technology Start-ups (Jolly et al.,1992), Global Start-ups (Oviatt and McDougall, 1995), Instant Exporters (McAuley,1999), Instant Internationals (Fillis, 2001), Born-Internationals (Kundu andKatz, 2003),Micromultinationals (Dimitratos et al., 2003), 그리고 Early Internationalising Firms (Rialp et al., 2005) 등이 그 경우이다.

 

현대 경영학에서 이 분야가 주목을 받게된 계기는 Rennie(1993)의 맥킨지 컨설팅과 진행한 호주 제조기업에 대한 사례에서 부터 시작한다. 호주제조업체들의 해외진출 현상에 대해서 진행된 컨설팅 와중에 적지 않은 수의 기업들이 창업직후 해외로 진출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성과를 올리고 있는점에 주목한 Rennie(1993)의 연구에 의해서 'Born Global'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북미, 유럽, 아시아에 걸처 유사한 현상을 보이는 기업들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보고 되었다Madsen et al., 2000; Servais & Rasmussen, 2000; Rasmussen et al., 2001; Aspelund & Moen, 2001; Moen, 2002; Moen & Servais, 2002; Andersson & Wictor, 2003; Bloodgood et al., 1996; Burgel & Murray, 2000; Autio & Sapienza, 2000; Autio et al., 2000; Zahra et al., 2000). 이런 연구들의 흐름은 개괄적으로 살펴볼 경우 몇가지 주요 연구 방향에 대한 변천과정을 담고 있다.

by intercrow | 2008/06/19 18:09 | 트랙백(20)

냉면집

여름별미 냉면, 시원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로 사랑받는 냉면집들.
비빔냉면,물냉면,회냉면, 함흥식 냉면과 평양식 냉면집 등 맛있는 냉면집, 싸고 푸짐한 냉면집 집중분석!


평양냉면
평양면옥

메밀을 그날그날 직접 갈아서 뽑는다.
육수가 싱거운 듯하나 속이 확 뚫리는 것처럼 시원하고 뒷맛이 무척 깔끔하다. 냉면 고명 위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내는 점이 특이하다. 쇠고기 사태와 돼지고기 삼겹살을 함께 고아 육수를 낸다. 

031-877-2282 ㅣ메밀냉면이란 메뉴명으로 6500원ㅣ 의정부 병무지청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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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래옥

해방직후 1946년 문을 열어 60년 가까이 평양냉면을 만들어온 곳.
깊은 육수 맛을 내기 위해 쇠고기 양지부위를 푹 삶아 기름을 걷어낸 진국으로 사리를 말아낸다.
메밀가루가 넉넉히 들어간 면발이 씹는데 부담이 적다.
을지로4가와 청계천4가를 잇는 골목 안에 있다.

02-2265-0151ㅣ평양냉면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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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02-2266-7052)과 필동면옥(02-2266-2611)

의정부 평양면옥의 기술을 전수받아 여동생들이 운영하는 냉면집.
게다가 을지면옥에서 매일 메밀가루를 뽑아 필동면옥에 공급해 두 집의 냉면 맛이 무척 흡사하다.
을지로3가 공구거리에 있는 을지면옥은 나이 드신 노인분이 많고, 대한극장 뒤에 있는 필동면옥은 가족단위 손님들이 주류다. 양쪽 모두 냉면 값은 6500원.

을지면옥 상세정보와 리뷰가 궁금하세요?  필동면옥 상세정보와 리뷰가 궁금하세요?


장충동평양면옥

평양에서 직접 냉면집을 운영했던 주인할머니가 30여년 전에 문을 열었다.
현재는 50대 아들이 맡아서 경영하고 있다. 면을 뽑을 때 메밀가루를 다른 곳보다 많이 사용해 씹는 맛은 덜하지만 구수한 뒷맛이 좋다.

02-2267-7784ㅣ6500원 ㅣ 강남 논현동(02-549-5500)에 분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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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면옥

입구에 들어서면 냉면의 육수로 변신할 날을 기다리며 땅속에 얌전하게 묻혀 있는 동치미독이 제일 먼저 반긴다.
메밀면과 육수가 맹맹한 듯하면서 담백하다.

02-777-2269ㅣ 무교동 삼성화재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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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면옥

한우고기로 육수를 내고 메밀가루를 주원료로 한 사리를 말아서 낸다.
같은 값에 쇠고기 고명을 빼고 사리를 곱빼기로 주던 '민짜 냉면'이 인기였는데 지난해 재단장한 뒤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02-752-1945 ㅣ물냉면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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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평양냉면의 육수에 질긴 함흥냉면의 사리를 말아낸 퓨전스타일이다.
육수의 색깔이 짙고 고기 맛이 강한데 빙수처럼 걸쭉하게 얼려내 잘못 들이켜다간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얼얼하다.
염리동 동사무소 근처에 위치.

02-71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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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냉면

오장동함흥냉면집

오랜 세월 한자리에 함흥냉면을 고집하는 집들이 몰려 있는 오장동의 터줏대감.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아 가위의 도움 없이는 자르기가 쉽지 않다.
매콤.새콤.달콤한 회냉면의 자극은 한여름의 더위도 잊게 할 정도다.

02-2267-9500 서울시 중구 오장동 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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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동 흥남집

다른 집의 냉면에 비해 올이 굵고 미끈거리는 특징이 있다.
면발도 상당히 부드러운 편.
비빔 양념 맛도 참기름의 고소함은 강하지만 심하게 맵지 않아 할아버지 등 나이 든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02-2266-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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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면옥

오장동에 뒤늦게 가세했지만 줄 서기 싫어하는 젊은 사람들이 한번 두번 맛보다 단골이 되는 곳이다.
뜨거운 육수는 고기 냄새.마늘 향 등이 강하지 않다.
그래도 회냉면의 매운 맛을 달랜다고 벌컥 마셨다가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02-2273-4889 ㅣ서울 중구 오장동 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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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보냉면

회냉면의 매력은 달고 맵고 신 세가지 맛의 조화.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은 균형으로 회냉면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단물이 나오는 배를 고명으로 얹어 맨 마지막 젓가락으로 매운 맛을 달랠 수 있다. 종로 4가 시계 골목 안에 있다
02-2267-6922 ㅣ서울 종로구 예지동 5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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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푸짐한 냉면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

동인천역에서 화평철교를 건너면 냉면집 20여곳이 몰려 있는 냉면 거리가 있다. 이곳의 냉면은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냉면을 가득 담아주기 때문에 세숫대야 냉면으로 불린다.
매번 "곱빼기"를 외쳐대던 어른도 한 그릇을 다 비우기 만만치 않을 정도다. 그래도 양이 찰 때까지 면과 육수를 무한정 준다.
동네 초입에 있는 '할머니냉면'이 제일 붐빈다.

032-874-6006 ㅣ인천광역시 남구 주안2동ㅣ 물냉면 3000원, 비빔냉면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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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냉면

코끝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매운 비빔냉면으로 유명하다.
쇠고기 잡뼈를 푹 고아낸 진국과 동치미 국물을 가미한 육수를 양이 찰 때까지 스스로 갖다 마실 수 있는데 값은 단돈 3000원.
잠실 신천역 부근에 있으며 일요일은 휴무.

02-424-7192ㅣ서울 송파구 신천역 훼미리마트 방향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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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대봉냉면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시장'스타일 최고 냉면으로 꼽힌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두 가지를 매운 정도에 따라 6단계로 나눠 낸다.
값은 4000원 동일. 500원 더 비싼 곱빼기를 시켰다간 배가 불러 오후 내내 허리띠를 풀고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02-762-4407   서울 종로구 숭인동 56-25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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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tercrow | 2008/06/15 07:23 | 쓸만한정보 | 트랙백(1)

구조방정식을 이용한 CFA(확인적 요인분석)

구조방정식 모형에서 확인적 요인분석 혹은 확증적 요인분석 등으로 불리는 CFA에 대해서 몇가지 잘못알기 쉬운 부분을 정리해본다.

확인적 요인분석이란 우선 SPSS등을 이용해서 수행할 수 있는 탐색적 요인분석하고는 다르다. 왜 다르냐에 대해서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여기는 수리통계전문가를 위한 블로그가 아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수준에서만 정리해보자

우선 탐색적 요인분석이란 말 그대로 탐색적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해야 한다. 탐색적이라는 말은 실행 이전에 한번 탬색을 해본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가장 좋다. 즉, 연구모형의 이론적 배경이 설정되기 전에 설문항목 중 다항목 측정치들이 각 문항간에 있어 얼마나 차별적인지 혹은 다른 연구자들이 이걸 사용해도 나와 비슷한 경향을 나타낼 확률이 높은지 등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가 보고자 하는 가설의 검증과는 무관한 것으로 자료 자체의 경향성과 특히 연구자의 설문문항에 대한 일관성 등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색적요인분석은 이론적 배경이나 연구모형의 설정 없이도, 그냥 설문문항 자체만으로 진행이 가능하며, 이 과정을 통해 문제가 있는 측정문항의 경우 제외할 수 있는 통계적 근거를 갖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확인적요인분석(CFA)의 개념은 약간 다르다. 통상적으로 통계를 조금이라도 돌려본 사람이라면 탐색적요인분석 이후에 확인적 요인분석을 실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이 둘의 순서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인적 요인분석은 왜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역시 제목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보는데, 확인적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확인적이라는 말은 목적물에 대한 확인을 의미하는데, CFA를 수행하는 것은 바로 연구자가 설정한 연구이론의 배경과 이를 통한 연구모형에 있어 나의 설문측정 문항이 얼마나 일관적으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을 하는 과정이다. 즉, 탐색적 요인분석이 이론과 연구모형의 유무에 상관없이 설문문항 자체를 기준으로 진행된다면, 확인적 요인분석은 반듯이 이론에 기반한 연구모형을 중심으로 실험되는 것이다. 실제로 AMOS등을 이용해서 구조방정식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확인적 요인분석을 위해서는 모형과 같은 비주얼을 기반으로 테스트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확인적 요인분석은 탐색적 분석을 걸쳐 걸러진 문항이 나의 연구모형에 있어 얼마나 이론적 연결관계에 충실한지에 대한 실험이다.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 연구모형에 적합하지 않은 문항의 제거가 가능한 통계적 배경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확인적 요인분석을 실시할 때 착각하기 쉬운 사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요인분석의 대상이 되는 잠재변수에 대해서는 각 측정항목이 3개 이상일 경우에만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측정항목이 3개미만일 경우 그러니까 2개나 1개인 경우 행렬을 이용한 구조방정식을 풀어가다 보면 유의수준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하는 자유도가 음(-)이 나오게 된다. 즉, 그 유의수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AMOS등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면 측정변수 두개를 가진 하나의 잠재변수만에 대해 돌리게 되면 모델 설명부분에 자유도가 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항목 측정치 중에서 3개 미만은 제외한 상태에서 구조방정식 모형을 실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잠재변인들과 맞물려 한 항목 정도의 음(-) 자유도는 영향을 안주는 것처럼 나올 수도 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애초에 잘못된 항목을 집어놓은 통계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수순으로 외생변수와 내생변수를 각각 돌리는 것 혹은 한번에 돌리는 것 등에 대한 차이에서는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돌리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 모든 잠재변인을 각각 돌리는 경우에는 방법적으로 편의적인 경우라고 보는 시각이 다수이다. 따라서 가능하면 한번에 돌리는 것이 좋지만 너무 맣은 경우 내/외생 변수군으로 나누어 돌리는 수준까지만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판별타당성을 구하는 부분과 고차 확인적 요인분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도록 한다.

by intercrow | 2008/06/14 11:27 | 구조방정식(SEM) | 트랙백(10)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그 영향권 전체의 역사.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한 그 영향권 전체의 역사.

선사시대

구석기시대(BC 100000~10000)에 이란 고원에 나타난 인간의 주거흔적은 주로 서부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 남아 있으며 무리를 지어 수렵을 했으나, 도구제조는 아직 소규모였던 것 같다. 신석기문명의 특징인 동식물의 사육과 정착촌 형성 및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서부 이란에서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스테리안 공작). 농경생활은 BC 6000년까지 이란 고원과 후지스탄에 걸쳐 폭넓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러시아령 중앙 아시아, 메소포타미아 등 이웃과의 문화적 접촉이 있었던 것 같다. BC 5000~2500년경 험악한 자연환경 때문에 이란 고원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어서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과 같은 도시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엘람은 그 예외로 한편으로는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다른 한편으로는 고원지대 사이에서 문화중개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엘람의 두 유적지인 히사르와 시알크를 경유하여 북부 고원지대를 가로지르는 교역활동은 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귀금속 운반이었다는 사실이 시알크 4세의 원시 엘람 문자로 씌어진 점토판의 발견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밖에 파르스 지역이나 북서쪽의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교역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 이란 선사시대의 주요암흑시대라고 볼 수 있다.

BC 2500~1000년경에 이란 고원은 전보다 더욱 고립되었으나, 후반기에 들어 이란 역사에 획기적인 토기가 등장했다. BC 2400년경부터 북동쪽 구르간 평야에서 발달한 회색토기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또 청동제품과 무기의 발달도 특이한 것인데, 이것이 외부에서 도입된 것인지 자생적으로 발달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으나,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자그로스 산맥 넘어 서쪽지역에서는 이러한 변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BC 1500년경부터 북동쪽의 회색토기가 서부 이란에도 확산되는데 이는 새로운 민족의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대한 침입으로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역사시대가 시작됨을 뜻한다.

엘람인들

BC 4000년대말부터 3000년대초까지 이란 고원에는 메소포타미아식의 도시문명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저지대인 후지스탄에서는 엘람인이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다. 후지스탄 외에도 이 저지대의 북쪽과 동쪽으로 인접한 고지대도 포함하는 엘람에는 다양한 지역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일원화된 정치권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본 권력구조는 1명의 군주가 여러 공국의 통치자들을 지배하는 형태를 취했다. 군주의 바로 아래 동생이 부왕이 되었고, 아들은 수사 지역의 통치자가 되어 3명이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군주가 죽으면 부왕이 군주가 되고 바로 다음 동생이 부왕이 되는 식의 독특한 형제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다.서쪽의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 및 동쪽의 이란 고원과 밀접히 관련되어 전개된 엘람 문명의 역사는 상고시대·중고시대·근고시대로 구분된다.

상고시대 최초의 왕은 BC 2700년경에 등장했으나, 우르 제3왕조(BC 2094~2047)에 의해서 멸망했다. 엘람인들은 후에 이 왕조를 넘어뜨리나, 다시 함무라비(BC 1792~1750)의 바빌론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바빌론 왕국이 쇠퇴한 후 엘람의 에파르티 왕조의 쿠티르 나훈테 1세는 함무라비의 아들 삼수일루나(BC 1749~1712)를 패배시켜 독립을 획득했다.

에파르티 왕조가 BC 16세기말경에 사라진 후 약 200년간의 역사는 자료가 없어 아직 잘 알려져 있지않다. 그후 후지스탄 북동쪽 산맥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안샨 왕조의 등장으로 중고시대를 맞는다. 안샨 왕조는 쿰반누메나(BC 1285~1266경) 때에 정치적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그후 아시리아 세력이 부상하면서 갈등을 겪다가 BC 13세기말에 아시리아의 투쿨티 니누르타 1세가 아시리아의 세력을 남쪽으로 팽창시킬 때 안샨 왕조는 멸망했다. 그후 엘람에는 슈트루크 나훈테가 BC 1160년경에 새 왕조를 세웠다. 그의 뒤를 이어 계속 유능한 왕들의 통치로 거대한 군사력을 지니게 된 엘람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약탈하여 엘람의 수도 수사로 약탈품은 물론 석비까지 가져왔다. 그러나 바빌론에 네부카드네자르(BC 1124~1103경 재위)가 등장하여 세력을 회복하여 엘람을 공격하면서 중고시대가 끝났다. 이 시대에는 예전의 승계제도와 권력분립제가 무너져 부자상속이 빈번해지고 권력의 집중현상이 두드러졌다.

근고시대 들어 특히 BC 8~7세기의 약 100년간 엘람은 아시리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바빌론과 동맹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책도 헛되어 결국 아시리아는 BC 692~639년에 여러 번 엘람을 침입하여 수도인 수사를 초토화시켰다.

선사시대 엘람에서는 이란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발전된 형태의 토기를 생산했다. 문자형성 초기에는 설형문자도 사용했다. 그러나 설형문자 사용시기는 아주 짧았고 그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후 몇 세기 동안의 엘람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 의거해서밖에 알 수가 없다. 약 2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와 엘람 사이에는 계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졌고 무역이나 전쟁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의 문물이 엘람에 유입되어 이란 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BC 3000년대 엘람의 예술품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점은 유프라테스와 인더스 강변에서 발견되고 있는 동석(凍石)접시가 엘람에서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간의 무역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엘람이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던 BC 2000년대에 만들어진 사원유적지에는 메소포타미아의 건축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독자적인 구조의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다. 이 시기 엘람의 조각품 가운데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수사의 나피라수 왕후의 실물크기 청동상은 놀랄 만한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메디아 왕국

철기시대 초기에 이란 서부지역에서는 문화적·역사적으로 현격한 변화가 보인다. 철기시대는 제1기(BC 1300~1000), 제2기(BC 1000~800/750), 제3기(BC 750~550)로 나뉘며, 제3기는 메디아 왕국시대에 해당된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인들이 이란 고원에서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은 시기는 철기시대였다. BC 9세기 중엽이 되면 대표적인 두 이란족인 메디아인페르시아인이 설형문자기록에 나타난다. 메디아인들은 자그로스 산맥 동부 전체를 장악했고 점차 자그로스 산맥 서부로 진출했다. 페르시아인들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북부 우루미아 호 근처나 때로는 중서부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가 후에 자그로스 산맥 남서부로 갔다가 마침내 파르스 지역까지 진출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 두 이란족이 동에서 서로 이동했음이 분명해진다.

회색 또는 흑회색 토기가 이란의 동북쪽에서 서부 이란으로 들어갔다는 사실도 이러한 이동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란족들이 최초로 자그로스 지역에 정착한 때를 BC 1300년경인 제1철기시대로 추정할 수 있다. 제1·2철기시대 문화의 분포는 대략 기록에 나타난 두 이란 민족의 분포와 일치한다. 제1·2철기시대 문화가 출현하지 않은 지역들은 우라르투·아시리아·엘람 등 비이란계 토착 세력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제3철기시대 문화는 자그로스 전체에 분포되어 있고, BC 7세기말부터 BC 6세기초에 메디아 왕조를 탄생시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BC 8세기경 데이오세스가 메디아 왕국을 엑바타나에 세웠고 그후 아들 프라오르테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일찍이 BC 9세기초에 서부 이란으로 들어온 스키타이족이 7세기 무렵에는 아시리아에 상당한 위협세력이 될 정도로 성장하여 이 지역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다. 메디아 왕국은 한때 스키타이인들 때문에 정치의 공백기까지 생겼으나 키악사레스 왕(BC 625~585) 때 이들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바빌론과 제휴하고 아시리아를 재침공하여 BC 609년에 멸망시켰다. 키악사레스가 죽을 무렵 그는 할리스 강(키질 강)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전지역, 지금의 테헤란에 이르는 서부 이란 전체와 파르스를 포함하는 남서부 이란 전체를 지배했다. 이렇게 넓은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왕국을 형성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고 연맹체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메디아 왕조는 그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당했고 이때부터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인 아케메네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시대

키루스 2세는 크로이수스가 통치하던 리디아를 공격하여 BC 546년에 멸망시켰다. 그후 BC 539년에는 바빌론을 정복했다. 키루스는 바빌론 내부의 불화와 불만을 최대한 이용하여 순식간에 정복을 실현했고 페르시아가 바빌론의 모든 정복지를 계승함으로써 영토가 이집트까지 확대되었다. 이란 동부지역의 호전적 부족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키루스는 BC 529년 옥수스와 작사르테스 강변 부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는 525년 이집트 원정에 착수하여 거의 완료단계에 들어간 때인 BC 522년에 동생 바르디야의 반란이 이란에서 일어나자 급거 귀국했으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그후 캄비세스군의 장군이자 아케메네스 왕가의 왕자 중 한 사람이었던 다리우스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다리우스는 권좌에 오른 후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해 흑해 서안과 북안의 스키타이인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도 정복했다. BC 500년 그리스의 이오니아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으나, 다리우스는 BC 498, 494년 2차례의 군사진공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BC 492년에 다리우스의 사위 마르도니우스가 이오니아에 특별판무관이 되어 그곳 군주를 억압하는 한편 여러 도시에 민주정부를 재건했다. 같은 해 마르도니우스는 이오니아의 반란으로 잃었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회복했다. 그후 다리우스는 유명한 마라톤 전쟁(BC 490. 9. 12)에서 그리스 도시연합군에 패배하고 재침략을 준비하다가 BC 486년에 죽고, 장남 크세르크세스가 계승했다(→ 아테네).

크세르크세스 1세는 BC 485년 이집트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그곳의 전통적 행정체계를 무시하고, 페르시아식 행정체계를 철저하게 갖추어 나갔다. 그는 BC 480년 그리스 북부를 함락했으나 같은 해 8월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대패와 플라타이아 전쟁의 패배를 끝으로 오랜 원정에서 돌아와 수사·엑바타나·페르세폴리스 등에서 생활의 안락함 속에 묻혀버렸다. BC 465년 후궁들간의 음모로 크세르크세스가 암살당한 후 후궁의 병폐는 점차 힘을 소모시키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사후 아케메네스의 왕위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4~425), 크세르크세스 2세(BC 425~424) 및 다리우스 2세(BC 423~404)로 계승되었다. 이들의 통치기간에는 반란과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또 그리스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60~404)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인들은 처음엔 아테네와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후에는 스파르타와 가까워졌다. 결국 BC 404년 페르시아의 지원과 스파르타의 막강한 병력으로 아테네는 몰락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BC 404~359 재위)는 재위중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여 스파르타를 누르고 에게 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BC 405년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해 이집트가 독립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BC 359년 계략과 술수, 하렘의 음모와 살인의 점철 속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즉위했다. 그는 취임 즉시 내분의 원인이 되어온 많은 인척들을 척결했으나 그 자신도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증손자인 전 사트라프 다리우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BC 334년 5월 아케메네스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을 받아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패한 뒤, BC 330년 4월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수중에 떨어졌고 같은 해 여름 피난길에서 살해되었다.

다민족국가인 아케메네스 제국은 집단적 사회문화가 특징이어서 페르시아적인 것, 특히 아케메네스 시대의 특성을 가려내기가 힘들다. 페르시아인들은 본래 고대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나 이 언어는 문자가 없었고 다리우스가 왕위에 올라 자신의 통치 초기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울 때 문자를 만들도록 명령하여 처음 문자가 만들어졌다. 고대 페르시아어는 실무언어로 사용하지 않았고 엘람어가 파르스 지역과 엘람 지역의 행정언어로 사용된 것 같다. 그리고 아람어가 행정기구에 더불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조직은 일반적으로 전사 및 귀족·사제·농민 및 유목민의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적 질서 위에 부족제적 구조가 횡적으로 가로놓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중 왕'이란 칭호는 중앙권력이 피라미드식 권력구조를 통해 제국을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사회권력 구조는 지배권력의 요구와 피지배민족들의 정치적 이상의 영향을 받아 많은 변화를 보였지만 후대에까지 페르시아식 문화의 이상형으로 존중되고 있다.

고대 이란인들은 다신교적인 성격의 종교를 믿으며 가축헌납, 불의숭상 및 알코올기가 있는 하오마나무즙 마시기 등을 행했다. 그러다가 BC 600년경 이란 고원의 북동쪽에 이란의 예언자 겸 스승인 조로아스터가 나타났다. 그는 위선(Druj:악의 우두머리)을 배척하고 진실과 정의를 역설했다. 그의 신은 아후라 마즈다로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자 창조주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일신교일지라도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었고, 둘 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투쟁을 벌인다고 보았다. 더구나 그는 낭비적인 가축헌납을 중단시키고 대신 진리의 상징으로 불을 사용하여 고대 이란인의 관행을 개조했다(→ 동물). 단지 하오마나무 즙 마시기는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다리우스·크세르크세스도 조로아스터의 추종자인 듯하다. 조로아스터교의 추종자들과 고대 이란 종교의 추종자들 사이에 갈등이 노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타협과 조화로 이를 극복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2세의 통치중에는 조로아스터력이 채택되었으며, 또 고대 이란의 신 미트라와 여신 아나히타도 조로아스터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와 같이 왕실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아케메네스의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지만, 이 종교는 조로아스터가 본래 의도했던 조로아스터교는 아니었고 매우 변해 있었다. 그후 사산 왕조시대의 조로아스터교는 더욱 변모하여 일반대중의 관행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관행 및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순수한 가르침의 혼합물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종교처럼 예술도 중근동의 다양한 문화를 종합한 형태였지만 이란인 자신들의 독창적인 것이었으며, 이 현상은 다리우스 1세 때 그리스 공예자기가 대량 유입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현존하는 아케메네스의 건축물 가운데 페르세폴리스 북쪽, 키루스의 수도 파사르가다에에 약간 남아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그곳의 정문건물과 알현실은 당시 건축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BC 518년 다리우스가 수도를 페르세폴리스로 옮기자 새로운 궁성의 건설이 시작되어 크세르크세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거의 반세기 만에 완성되었다. 이 궁성은 13m 높이와 세로 500m, 가로300m 넓이의 터에 세워진 것이다. 다리우스 황제의 주된 거주지였던 수사의 왕궁은 영역 내의 각 지방, 즉 레바논의 삼목, 에티오피아의 상아, 이오니아의 장식, 이집트의 은과 흑단 등등의 공급자료와 각 지역의 석공을 동원하여 지었다고 황제는 자랑했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건축, 특히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은 제국 내의 여러 영토에서 온 건축자료와 인력을 총동원하여 완성했다. 조형미도 갖추었고 그 규모도 웅대하여 제국의 기능과 페르시아적 포용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또 건축 전체는 항상 페르시아적 고유미를 풍기게 한 점이 특이하다. 건축 외에도 금가공업에 이러한 특성이 돋보인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금가공기술은 메디아 왕국에서 발달된 것으로서 후에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에 이르러 완성된 페르세폴리스의 궁성 등 건축물은 고대문명세계의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 제국의 황제(왕 중 왕)는 많은 인종과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에 영토를 20개의 사트라피(Satrapy 州)로 나누었고, 각 사트라피는 명목상으로는 황제가 임명하는 사트라프(총독)가 다스렸다. 이들은 귀족 또는 왕족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행정·사법 및 재정권의 행사는 물론, 심지어 외교와 주내문제의 처리에도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군대는 제국의 중요한 요소였다. 상비군의 정예부대는 1만 명의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가운데 1,000명가량은 황제의 친위부대를 구성했다(→ 1만인불사친위대). 따라서 이 정예부대를 통제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집된 제국의 정규병력은 페르시아인 장교의 통제를 받으며 제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했다. 또 그중에는 페르시아의 값진 은화를 벌려고 지원한 그리스 용병들도 상당히 섞여 있었다.

제국의 법체계에는 각 지역 거주민족의 관습법과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페르시아 법 등 2가지가 공존했다. 왕실재판관은 법률과 관습에 대해 왕에게 조언했다. 각 주에서는 사트라프가 최고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각 주에서 생산력에 따라 할당된 세액을 매년 금이나 은으로 지불하게 했다. 그리고 정확한 세액계산을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토지는 대부분 이란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일부 비(非)이란족들도 비슷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농업발달과 무역증진을 위해 육로의 보수와 해상로 개척에도 크게 공헌했다. 특히 다리우스는 이집트에 의해 시작되었던 홍해와 나일 강을 연결하는 운하개설계획을 완성하여 무역을 촉진했다. 아케메네스는 서아시아와 그리스에 이르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고, 예술·철학·문학·종교·경제·과학 등에 훌륭한 업적을 이룩하여 헬레니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수메르인들이 시작한 고대문명을 종결시키고 세계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공헌했다.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 제국시대

알렉산드로스는 BC 336~330년 사이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을 완료했다. 에게 해부터 인더스 강에 이르는 지역이 이 거대한 왕국에 흡수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중근동의 토착민과 그리스인 간의 혼인을 권장하여 그리스 문화를 심었지만, 행정구조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정복을 착수했을 때 직면한 두 적대세력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방호족과 이란 북부 및 북동쪽 변경지대를 수세기 동안 배회하던 유목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 소그디아나 수장의 딸 록사나와 결혼하는 등 호족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왕들이 고전했던 북쪽변방의 유목민들과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도 문명세계의 한계를 맛보았다.

BC 323년 그의 사망 후 예하 장군들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셀레우코스 1세가 제국의 동부지역을 장악하자 곧 인도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BC 304년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의 설립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패배하여 인더스 강 유역을 잃었다.

BC 290~280년 동부지역 유목민의 침입이 있었으나 이는 곧 격퇴되었으며, 셀레우코스 1세는 아시아의 헬레니즘화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BC 2세기 이후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들의 이주가 격감하면서 그리스어는 기반을 잃었으며, 이란의 상류계급조차 헬레니즘을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셀레우키아나 수사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던 이란인들조차 그리스 사상에 크게 물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100년도 채 못 되어 이란 세계에는 여러 민족의 거센 동요가 일었다. BC 3세기경 사르마트인들은 흑해 북부연안을 점령했고, BC 3세기말에 이란족의 한 갈래인 월지는 박트리아를 침략했다. 또 이란계 유목부족이었던 파르니족은 BC 250년경에 파르티아 제국을 세워 500년간 존속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팽창한 로마 제국과 우열을 다투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같이 셀레우코스 왕국도 각 사트라프의 반란에 큰 타격을 입었다. 파르티아는 고원지대의 농산물이 빈약한 곳이었으나 동서간의 무역로인 비단길에 위치하여 대상으로부터 통행세를 받아 재정을 메웠다. 이 나라는 본래 셀레우코스 왕국에 속했으나 그 굴레를 맨 처음 벗어났다.

파르니 부족의 족장 아르사케스는 BC 247년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국가를 창설함으로써 파르티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르사크 왕조). 그들은 뛰어난 기마병이었으며 가부장적 부족전통을 계속 지켜나갔다. 아르사케스는 혈통이 가까운 파르티아족과 결합했으며 이란계 부족을 단합시켰다. 아르사케스는 부족들로부터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원래 셀레우코스 2세와 협력하여 파르티아를 공격하려 했던 디오도토스(BC 234 죽음)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후자의 사후 아들 디오도토스 2세의 정책전환으로 서로 연합했다. 아르사케스는 북쪽의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 셀레우코스 2세와도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이후 아르사케스는 왕이 되었고, 비단길에 위치한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세워 죽기(BC 217~211 추정) 전까지 이 도시에 사는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르타바누스(BC 211~191 재위)는 아르사케스 2세라고도 한다. 그는 파르티아와 히르카니아에서 권력의 기반을 다지면서 메디아 지역으로 영토확장을 시도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파르티아를 침공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 간의 불화는 셀레우코스 2세와의 타협으로 끝이 났다. 그후 아르타바누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역시 내실을 꾀하고 대외평화정책을 취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했을 뿐이다.

미트라다테스 1세의 왕위계승(BC 171경)은 파르티아 왕조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그의 즉위시부터 AD 10년까지 약 180년을 역사가들은 친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이 기간에는 그리스어가 파르티아에서 사용되었고 예술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미트라다테스 1세 때의 파르티아는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BC 155년 메디아를 정복했고, BC 148~147년에 수도를 엑바타나로 옮겼으며, BC 141년에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정복하여,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미트라다테스 1세와 마찬가지로 아들 프라테스 2세도 동부지역에서 크고 작은 싸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BC 129년 메디아인의 도움으로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프라테스는 그의 삶 대부분을 그리스인과 싸우는 데 소비했다. 이같은 운명은 그의 후계자이자 삼촌이었던 아르타바누스 2세(BC 128~124/123 재위)에까지 이어졌다. 미트라다테스 2세는 파르티아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서쪽으로 확장을 꾀했으므로 로마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으나, 결국 유프라테스 강을 양국의 국경선으로 합의했다.

파르티아는 한무제(漢武帝:BC 140~87)의 사신을 영접했는데 이것이 중국과 이란 사이에 최초의 외교접촉이었다(→ 중국사). 한나라는 자신의 북쪽연방 유목민이었던 흉노족과 싸우기 위해 파르티아의 뛰어난 기병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트라다테스 2세의 파르티아는 동서를 다스리는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국위를 떨쳤다. 그의 사후 왕위는 아들 프라테스 3세(BC 70~58/57)에게 계승되었다.

카프카스 지역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지역에 로마의 세 집정관 중 한 사람인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국가들의 울타리를 만들어 파르티아를 포위하려 했다. 이 정책은 동료 집정관 크라수스가 입안한 것이었다. 결국 양국이 충돌하게 되자 로마의 세 집정관 중 유일하게 무공을 못 세운 크라수스가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BC 53년 카레 근처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자신도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카레 전투). BC 48년 카이사르의 파르티아에 대한 복수계획은 그 자신이 암살되어 물거품이 되었고, 이 계획을 BC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추운 날씨 때문에 BC 34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했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권력투쟁으로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파르티아와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전쟁의 승패가 불분명하고 그 결과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체결되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지역은 서로간의 전략요충지여서 그후 몇 세기 동안 평화의 장애물로 남게 되었다.

AD 12~162년의 150년간은 '반(反)헬레니즘' 시대로 알려질 정도로 파르티아의 고유문화를 숭상하고 외국적인 것을 배척했다. 아르타바누스 3세의 통치 아래 파르티아는 문화적으로는 찬란하나 정치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평화에 걸림돌이 되어왔던 아르메니아에 그가 아들을 총독으로 임명하려 하자 로마가 즉각 반발했으나 37년에 협상하여 아르메니아의 현상유지정책에 합의했다. 아르타바누스 3세는 아르메니아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옛날 영역을 회복하려 한 것 같다.

51~122년 파르티아는 중앙권력의 약화로 몇몇 군소국가로 점진적 분열양상을 보이다가 1세기 들어 북부 11개와 남부 7개 등 18개 군소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중앙정부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이후 1세기말경에 파르티아 왕국에서는 잦은 왕권다툼이 일어나 두 사람의 왕이 동시에 등장하거나 왕위 잠칭자의 도전을 받기도 했다. 또 로마 제국과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었다. 예를 들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165, 194년, 즉 불과 30년 사이에 2번이나 로마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물론 파르티아도 복수전을 전개하여 로마의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도시를 초토화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의 파탄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가 224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티아는 무너졌다.

파르티아 제국의 건축술은 티그리스 강을 사이에 두고 자란 쌍둥이 도시였던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3면을 벽으로 둘러싸고 1면을 터놓은 커다란 홀(iwan)을 두는 이 건축양식은 그리스 양식을 점차 멀리하는 것이었으나, 이슬람 건축의 특징과도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막의 도시 하트라는 파르티아 도시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 도시는 군사요새로 그 성벽이 가장 인상적이다.

사산 왕조시대

227년 서부 이란 지역에서 통치기반을 굳힌 파르티아의 지방영주 아르다시르는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는 자신을 '이란족의 왕 중 왕'이라 칭하고, 티그리스 강변의 고대도시 셀레우키아를 '아르다시르의 착한 행위'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여 크테시폰과 함께 그의 위세를 떨쳤다.

그의 아들 샤푸르 1세는 영역을 더욱 넓혔다. 여러번 로마군과 싸워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는 전사했고 황제 발레리아누스(253~260)를 포로로 잡을 정도로 샤푸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이란족과 비(非)이란족의 왕 중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으며, 이 칭호는 사산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사산 왕조의 영역은 파르티아 때보다 훨씬 광대했는데, 이것은 그 행정력이 효율적이었고 군사력이 막강했음을 뜻한다. 중앙 아시아 쪽의 동북부 국경지역에서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쿠샨 왕조의 서부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사산 왕조의 외교정책은 변방의 방어와 영토확장에 목적을 두고 추진되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 왕조의 세습적인 자치왕국을 폐지하고 그대신 왕족 가운데서 총독을 임명 또는 해임했다. 따라서 왕위계승자는 보통 가장 큰 주의 총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결과 중앙집권이 매우 강화되었다. 더구나 황제 개인에게보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조되어서 왕실의 집단지도제와 유사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시대 로마와의 분쟁이 가장 첨예했던 곳은 아르메니아 지역이었다. 바람 2세의 사후(293) 계승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비록 샤푸르 1세의 막내아들 나르세스가 승리하여 즉위했지만 아르메니아는 296년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다. 아르메니아도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 되고 로마도 그리스도교화되었으므로 이후 이란과 로마-비잔티움 사이의 분쟁은 종교적 분쟁으로까지 변모했다.

샤푸르 2세의 아르메니아 실지회복(失地回復)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로마의 콘스탄티우스 사후(361), 티그리스 강변과 아르메니아 대부분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약 20년간의 혼란기(아르다시르 2세, 샤푸르 3세, 바람 4세)가 지난 후 야즈데게르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귀족들의 원성을 샀으며, 이때문에 그의 사후(420) 아들 바람 4세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동부에 헤프탈족의 침입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100년간의 평화조약을 맺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카바드 1세(488~531)는 정통 조로아스터교를 재정립했으며, 과세제도의 신설과 토지세의 개혁 등을 이룬 명망 있는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군대를 강화하여 그의 세력은 흑해까지 다다랐다.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와 이란의 전통적인 신들의 결합이 파르티아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사산 왕조 때는 불과 빛의 숭배의식과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경배의식이 강조되었다. 더구나 국가와 교회의 관계도 밀접하게 되어 상호보완적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왕조시대에 체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최고사제는 종교관할권뿐만 아니라 후대에 왕위계승자의 선정과 국사(國事)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선과 악, 즉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의 대결에서 선한 신령과 천사는 모두 전지전능한 아후라 마즈다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사산 왕조의 근거지인 파르스 지역의 관행도 종교의례 속에 상당히 스며들어간 것 같다. 그래서 태양신 미트라도 조로아스터교와 결합된 것이다(→ 미트라교).

신학도 발전되어 아후라 마즈다, 즉 오르미즈드와 아리만을 무한한 시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종래의 이원적(二元的) 개념을 수정하려는 주르반 종파가 나타났으나, 호스로우 1세(531~579 재위)가 이를 이단으로 선언함으로써 사산 왕조의 조로아스터교는 의례와 순수한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그리스도교는 3세기 중반 이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의 아람어 사용공동체에서 추종자가 많았다.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산 왕조는 그리스도교를 관용했으나 마니교나 그노시스교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가 점차 그리스도교화된 339년 이후 그리스도교도들은 샤푸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그리스도교는 사산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샤푸르 1세 치하에서 마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창시자 마니(216?~274?)는 바빌로니아에 살던 파르티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이란어를 사용했고 그의 교리는 그노시스교의 사상과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함께 결합하려 애썼다. 이러한 마니의 가르침은 샤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이란과 외부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었으나 그의 아들 바람 1세의 탄압정책으로 마니는 처형되었고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후 마니교는 호라산 지역과 사산 제국의 동부 및 중앙 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사산 왕조 예술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석회석 절벽위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물이다(→ 조소).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나크시에 로스탐과 나크시에 라자브 등이 현존하는 유적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부조물들의 모습을 통해 사산 왕조 통치자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호스로우 2세(590/591~628)가 크테시폰에 세운 거대한 궁전이다. 일부가 남아 있는 이 궁전은 구운 벽돌로 돔 형식의 천장을 반드는 사산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사산 왕조시대에는 문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왕조가 문학보다 종교 우선정책을 추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외국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외국문학도 들어와 중세 팔라비어로 번역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번역작품은 호스로우 1세 때 완성된 〈칼릴라와 딤네 Kalilag and Dimnag〉인데 인도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외에도 헬레니즘의 낭만주의 문학도 소개되었다.

투르크족은 560년경 이란 동부지역에서 출현하여 중근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산 왕조의 영역에 심각한 위협은 되지 않았다. 호스로우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호르미즈드 4세(579~590 재위)는 비잔티움과 평화협상에 실패했지만, 그리스도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은 그의 아들 호스로우 2세에까지 이어져 결국 조로아스터교도들의 반란을 야기시켰다. 호스로우 2세는 비잔티움으로 도피했으며, 로마 황제 마우리스(582~602)의 도움으로 591년 크테시폰에서 다시 왕위에 올라 그의 통치기간 안에 번영을 누렸다.

마우리스 황제가 암살되자(602) 비잔티움과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스로우 2세의 군대는 안티오크(611)·다마스쿠스(613)·예루살렘(614)·이집트(619) 등을 차례로 정복했다. 610년 왕위에 오른 비잔티움의 헤라클리우스는 보복공격을 시작하여 627년에는 티그리스 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후 호스로우 2세는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되었고(628), 카바드의 사후 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왕위에 올랐다(633).

비잔티움과 이란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사산 왕조의 세력은 쇠퇴했고, 이슬람화된 신흥 아랍족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사산 왕조의 최고지휘관 루스탐이 전사했으며, 야즈데게르드 왕도 651년에 메르프 근처에서 암살되었는데, 이와 함께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나하반드 전투). 제국의 몰락과 함께 조로아스터교도 점차 쇠퇴일로를 걸었으나, 그당시 이슬람교도들은 조로아스터교에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에서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 야즈드 및 봄베이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산 왕조의 멸망에서 사파위 왕조의 성립까지

아랍인에게 정복된 뒤 이란의 대부분은 후지스탄·메디아·호라산·시스탄 등의 4주로 분할되었다. 아랍 부족들의 군대는 쿰과 시라즈와 같은 많은 주둔도시에 배치되었지만 최대규모의 병단은 중앙 아시아 방면까지 정복의 손을 넓히기 위한 세력으로 하기 위해 호라산에 배치되어 있었다. 아랍인은 이란의 민중과 그들의 종교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디후칸(대지주계급)과 동부의 소제후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토지와 특권을 보유하는 대신 아랍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일정한 조세 또는 공물을 징수하는 책임을 졌다. 아랍계 통치자와 지주계급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 아랍과 이란 민중과의 혼인이 널리 행해졌고 또 이들 두 민족의 언어가 혼합되었기 때문에 근대 페르시아어의 기초가 일찍이 이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마이야 왕조 말기에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농경민·도시민뿐만 아니라 많은 디후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생겼다. 이슬람에 개종한 이란인에게까지 지시아(jizyah)가 부과되었던 것이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아바스가의 아부 무슬림은 혁명에 이들 이란인들의 불만을 이용했다. 아부 무슬림은 교묘한 술책을 이용하여 호라산의 아랍 사회가 부족간의 항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을 이용하고 또 예멘계 주민이 총봉기한 데 힘입어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켰다(750). 이때의 공로로 그는 호라산의 총독이 되었다. 그런데 아부 무슬림의 세력 신장에 위협을 느낀 아바스 왕조 제2대 칼리프인 만수르는 그를 살해했고 그뒤 거의 50년간에 걸쳐 호라산에는 반란이 잇따랐다. 803년에 바르마크가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타도된 뒤 대반란이 폭발하고 하룬은 반란진압에 나섰지만 도중 투스에서 병사했다. 호라산의 통치권은 하룬의 아들 마문의 손으로 옮겨졌다. 마문은 치안을 회복했지만 칼리프와 갈등을 일으켜 새로 호라산군을 조직하여 타히르의 지휘하에 두었다. 타히르는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점령하고 아민을 살해했다(813). 호라산군은 몇번의 전투 후 여러 주에 대한 칼리프 마문의 통치를 회복했다. 그뒤 마즈다크교도의 세력이 확대되었던 이란에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마문은 타히르를 호라산 동쪽의 총독에 임명할 필요를 인정했다. 타히르가는 872년까지 사실상 독립왕조로서 존속하고 동시에 바그다드에 있는 호라산 출신의 칼리프 친위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타히르 왕조의 지휘하에 있었던 반세기 동안 이란 동북지방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안정을 유지했고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타히르 왕조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수도 니샤푸르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산 지방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족 중에는 바그다드와 사마라 등에서 요직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이 왕조의 세력은 보다 넓은 범위에 미쳤다.

군소왕조들

타히르 왕조는 호라산 지방에서 반독립의 정권이었지만 이것은 아랍이 지금까지와 다른 조건에서 이란계 지주귀족들과의 타협을 계속했던 결과였다. 칼리프 정권이 점점 약해지고 아바스가의 왕자 무와파크도 잔지(흑인노예)의 반란 진압에 여념이 없게 된 사이 아바스 왕조에 실망을 느낀 이란 민중이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란의 아바스 왕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던 타히르 왕조는 아제르바이잔에서의 훌라미파의 반란을 간신히 진압했을 뿐, 카스피 해 남안과 주변의 산지에 있던 이란계 호족과 시아파의 망명 지도자들에 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865년부터는 이들의 지방의 봉기에서 훨씬 대규모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하와리즈파의 활동으로 인한 심각한 사회불안에 의해 더욱 격심하게 되었다. 이란은 하와리즈파의 약탈·파괴와 시아파의 권모술책의 무대가 되었다. 시아파는 마문이 자파의 지도자들과 타협을 시도하던 시기에 잠시 번영을 누리고 그 사이 카스피 해 남안지방에서 자파의 왕조를 세우고 인접한 다이람 지방까지 세력을 신장했다. 하와리즈파 세력을 등에 업고 시스탄 지방에서는 사파르 왕조가 일어났다. 창건자 야쿠브 이븐 라이스는 하와리즈파의 전사들을 모아 자신의 군대로 편성하면서 자파가 일으킨 소요의 진압자인 체했다. 그리하여 야쿠브는 잠시 파르스에서 시라즈까지의 이란 전토를 장악했다. 그는 후지스탄의 지방에 의지해 칼리프 정권 자체를 위협하고 호라산에서 타히르 세력을 일소했다. 야쿠브는 이렇게 하여 이란인들에게 위대한 영웅으로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호라산 북부에서 타히르 왕조를 밀어냈기 때문에 이 지방에 세력진공 상태를 야기했다. 이곳에 이스마일이 사만 왕조를 세웠다.

사만 왕조의 주요도시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비단길에 위치하여 동아시아와 광범위한 통상에 의해 부를 누리고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르시아어는 위대한 시의 언어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철학과 역사의 연구가 장려되었고 이란풍의 이슬람 문화의 기초가 세워졌다. 사만 왕조는 다이람 산지에 있는 시아파의 지도자들을 정복할 수 없었는데 이 지방에서 부이 왕조가 일어났다. 원래 사만 왕조의 장교였던 부이의 세 아들이 칼리프 정권을 좌우하는데 성공하여 이란 서부와 이라크에 걸쳐 이란계 새 왕조를 세웠다. 이 두 왕조와 그 가신들 및 그들의 세력이 미약한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호족 등은 모두 11세기에 투르크계의 셀주크 왕조에 정복되었다. 이란인의 세력은 이미 아랍의 세력에 침투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전면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는데 그뒤에 투르크계 유목 부족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민족이 중앙 아시아에서 진입하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가즈나 왕조셀주크

9세기 중엽 이래 모든 이슬람 왕국에 중앙 아시아에서 투르크계 포로와 노예를 매입하고 이들을 친위부대로 편성하는 관습이 널리 확산되었다. 각 왕조가 약체화함에 따라 투르크계 무장들은 점점 깊이 국정에 관여하게 되고 수도와 지방 각주에서 행정상의 요직을 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내란을 일으켜 왕조의 세력과 권위가 무너지게 되었다. 사만 왕조는 투르크계의 노예였던 알프 티긴을 호라산의 군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왕이 바뀌자 알프 티긴은 적대자에게 그 지위를 빼앗겨 962년 가즈나에 물러나 일단은 사만 왕조에 따르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왕국을 창건했다. 알프 티긴 사후 그의 아들과 알프 티긴의 맘루크(노예)들이 연이어 권력을 장악했는데 그중에 제5대 왕이 된 세뷔크티진은 사만 왕조와 친선관계를 계속하면서도 호라산 지방의 지배권을 얻었다. 세뷔크티진의 사후 1년 뒤 그의 아들 마흐무드가 계승했다. 그는 일반적으로는 지방정권의 왕으로 최초로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에 의해 이슬람교도의 본격적인 인도 침략이 시작되었다. 투르크계의 일레크 한(카라한) 왕조의 군주들이 동(東)투르키스탄 방면에서 들어와 사만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마흐무드는 그들과 옥수스 강을 경계로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10세기말에 이슬람에 귀의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투르크 부족들은 일레크 한인들의 통솔하에 트란스옥사니아 지방을 점령했다. 이 지방에 이주한 유목민 투르크멘족들(투르크 유목민 중 이슬람에 귀의한 사람들) 가운데 구즈족은 마흐무드에 의해 호라산에 옮겨왔다. 마흐무드의 아들들이 서로 정권다툼을 벌이는 사이 구즈족은 셀주크가의 토그릴과 챠그리의 지휘하에 호라산의 토호들에게 도움을 받아 가즈나 왕조의 군대를 덴덴칸에서 격파하고 이란 서부의 정복에도 나섰다. 1055년 토그릴은 바그다드에 들어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아래서 실권을 장악했다. 토그릴 이후 그 후계자 알프 아르슬란말리크 샤는 호라산 태생의 위대한 와지르 니잠 울 물크에 도움을 받아 이란 전토와 이라크·시리아를 자신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리고 각주에 셀주크가의 왕을 봉했다. 이 왕들의 군대는 이크타라고 하는 군사영지제도에 의해 유지되었다. 말리크 샤의 사후 이들 여러 왕들간의 세력다툼에서 영토는 분열을 거듭했지만 호라산 지방만은 예외로 말리크 샤의 아들 사자르가 1153년까지 질서를 유지했다. 그외의 왕령들은 대부분 아타베그로 불린 셀주크군하의 장군들이 분할하여 영유했다. 이들 아타베그들의 많은 수는 각각 왕조를 세웠지만 그들 가운데 이란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들의 왕조와 파르스 지방의 사르갈 왕조 등이었다. 이같은 분열을 타고 시아파 아사신파는 다이람의 고지에 견고한 근거지를 세우고 테러 행위에 의해 지배계급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노력했다.

셀주크족과 함께 투르크멘의 여러 부족이 대거 이주해왔기 때문에 이란의 경제는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광대한 경작지가 방목지로 변했다. 성벽을 둘러친 도시와 요새만 겨우 치안이 유지되었다. 그후 구즈족의 여러 집단이 호라산 지방에 몰려들어 셀주크의 마지막 술탄 산자르를 사로잡고 이 지방의 여러 도시를 약탈한 뒤 케르만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곳의 셀주크 왕국의 괴멸을 노리고 진격을 계속했으므로 토지의 황폐는 점점 격심해졌다. 산자르의 영토를 두고 원래의 가신이었던 화레즘의 샤와 아프가니스탄의 고르 왕조의 왕들이 서로 다투었지만 결국 화레즘 샤의 타카시와 그의 아들 아파 웃딘 무하마드가 고르 왕조와 이란의 나머지를 정복하고 트란스옥시아나도 점령했다. 그의 군대의 병사는 주로 아직 충분히 이슬람화하지 않고 이교의 문화를 남겼던 스텝 지대에 사는 킵차크족이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약탈을 행하고 혼란을 가중시켰다.

몽골족

이같은 이란의 황폐화를 더욱 심화시켜 페르시아 문화의 사회적·경제적 기초를 최종적으로 파괴시킨 것은 몽골족이었다.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 아래서 몽골족은 이란 전토에 권력을 확대하고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의 지휘하에 새로운 침략을 행하고 이 지방을 통치했다. 훌라구는 1256년 엘브루즈 산맥 중의 아사신의 여러 성채를 파괴하고 1258년 아바스 왕조의 최후의 칼리프를 죽이고 바그다드를 공략했다. 이렇게 하여 훌라구는 이란에 있어서 새로운 지방왕조의 시조로 되어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원(元)에 신속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독립군주로서 1335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일 한국

일 한국의 군주들은 북방에서는 킵차크 한국, 동북에서는 차가타이 한국에 있는 같은 몽골의 친족과 때때로 충돌했지만 거의 50년간 대외정책의 목표는 시리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충돌하여 한편에서는 십자군과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들과 몇 번씩 제휴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또 1260, 1303년에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결국 쓰라린 패배만 맛보았다. 내정면에서 일한국의 군주들이 채용했던 정책 가운데 가장 건설적이었던 것은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흑해에 이르는 통상을 일으키고 타브리즈를 국제통상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었다.

원래 몽골족은 대개 이슬람을 비롯해 그외 모든 종교집단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제3대 왕인 아흐마드 타크달(1281~84 재위)은 1292년에 이슬람교에 귀의했지만 몽골 귀족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조카인 아르군이 그뒤를 이어 이슬람교도들을 박해했다. 아르군이 88년 유대인의 의사 사드 웃 다울라를 재무대신에 등용했는데, 그 대신이 이슬람교도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해 나라가 대혼란에 빠지고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후 사드 웃 다울라는 실각해 처형당하고 모든 지방에서 처참한 유대교도 학살이 행해졌다. 다음해 아르군의 아들 가잔이 이미 이슬람에 개종한 상태에서 왕위에 추대되어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내용은 몽골족 침입 이전의 무인 봉지 등의 토지제도를 부활시키고 사회 질서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가잔이 일찍 죽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이슬람을 국가의 공인종교로 삼은 종교정책만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이란에 있는 많은 몽골 귀족과 부족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가잔의 동생 올제이투의 치세는 비교적 평온하고 번영한 시기였다. 가잔의 조카 아부 사이드하에서는 내외의 분열적 세력이 커져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 유력한 고관들은 일한국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아부 사이드의 사후 각각 자파가 받드는 왕자들을 앞세워 계승 다툼을 시작했다. 그중 하산 부즈루그가 1336~56년에 걸쳐 세력을 장악하고 몇 사람의 괴뢰 왕자들을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의 왕위에 앉혔다.

일 한국이 쇠퇴해가는 가운데 파르스·헤라트 두 지방이 독립했다. 헤라트는 쿠르드 왕조의 이름으로 알려진 옛 고르 왕조의 왕족에 의해, 한편 파르스는 무자파르 왕조로 독립했다. 또 자라이르 부족 외에 다른 유목부족의 수장들이 이란의 일부, 특히 루리스탄 지방을 지배했다. 호라산 지방에서는 사르다하르로 자칭하고 그 지방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무리가 결사체를 형성했다. 이란의 경제는 통상로의 붕괴와 무서운 질병의 만연으로 점점 쇠퇴해갔다. 도시문화의 요소 가운데 이러한 재액에도 불구하고 존속했던 것은 뒤에 티무르에 의해 거의 전부 파괴되어버렸다. 일 한국의 군주들은 간신히 동쪽 경계를 트란스옥사니아의 차가타이 한국의 군주들의 침입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1370~80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 무렵에는 쿠르드 왕조는 이미 그들에 대해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1383년 헤라트가 함락된 뒤 티무르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이란 전지역을 공략해버렸다. 그후 무장봉기는 가차 없이 잔학하게 진압되어 도시는 차차 파괴되고 그 주민은 학살되었다.

티무르 왕조와 투르크멘족

티무르는 중국으로 원정에 나서자마자 곧 죽고 그 정복지는 여러 자손들에게 분령되었다. 그 가운데 티무르의 아들 미란 샤와 샤 로흐는 이란 서부와 동부를, 손자인 빌 무하마드는 파르스 지방을 차지했다. 티무르 왕조는 일족 내부의 항쟁으로 약체화하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투르크멘족에게도 시달렸다.

당시 서부 이란은 투르크멘족의 카라 코윤루(흑양조)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잘라이르 왕조를 물리치고 그들의 독립왕조를 세웠다. 샤 로흐가 죽자 자한 샤는 카라 코윤루의 세력을 이란 북서부 깊숙이까지 확장하여 티무르 제국을 침범했다. 티무르 제국은 디야르바키르에 오랫동안 왕조를 세우고 있던 아크 코윤루(백양조)에게 의지했다. 자한 샤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1467년 패했다. 우준 하산은 단명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란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고 잠시 티무르 제국으로부터 헤라트를 빼앗기도 했다. 우준 하산의 아들 야쿠브(1478~90)는 몽골인 지배하에서 실시된 조세제도를 폐지하고 정통 이슬람 법에 따른 징세제도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득권층의 불만을 낳았고 아크 코윤루의 지지도를 떨어뜨렸으며 수니 광신도들의 신용도를 떨어뜨렸다. 야쿠브가 세제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도록 악화된 경제적 여건과 종교의 가면을 쓰고 새로운 징세제도를 강제하려 했던 일이 사파위 가문의 시아파 운동을 확산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사파위 왕조(1502~1736)

사파위 왕조를 세운 이스마일은 몽골 이교도들에게 이슬람교가 모독당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여 수피 종단 내의 한 종교운동을 일으킨 셰이크 사피 옷 딘의 후예였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종교적이고 현실과 거리가 있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이슬람교도 사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시아파의 열망을 대변하게 되었다. 15세기말까지 사파위가의 운동은 신비적인 힘과 피억압민중의 시아파에 대한 호응에 힘입어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1501년 이스마일은 아제르바이잔에서 백양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10년 만에 그는 이란 전체에서 패권을 잡았다. 사파위 가문은 시아파 이맘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이제 이란의 이슬람은 칼리프의 승인이 필요없는 알리 후예인 이맘이라는 통치자를 갖게 되었다. 사파위 왕조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이란을 통치해야 했다. 소아시아와 트란스옥사니아도 떨어져나갔고 서구에서 해상무역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대륙간 무역에 의존해왔던 이 지역 경제를 위협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일어나 이란의 서쪽으로의 팽창을 가로막았고 카프카스 산맥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오스만과 오랜 전쟁으로 자원은 더욱 고갈되었고 오스만은 아제르바이잔까지도 넘보게 되었다. 1639년 결국 이란은 예레반을 갖고 오스만 제국은 바그다드를 갖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비단길을 통한 무역이 이 왕조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이스마일의 후계자인 샤 타마스프(1524~76)는 카펫 직조를 국가 산업으로 격상시켰다. 샤 아바스 1세(1588~1629)는 유럽과의 직접적인 무역관계를 확립시켰지만 유럽과 거리가 멀리 떨어진 점과 오스만 제국이 중간에 가로놓여 있다는 장애 때문에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기는 어려웠다. 샤 아바스 1세는 군사제도도 개혁하여 유럽식으로 훈련되고 장비를 갖춘 상비군을 조직했고 관료기구도 재정비했다. 그러나 왕권약체화의 씨앗은 왕실내부에 있었다. 사파위 왕조는 장자상속의 확실한 체제가 세워져 있지 않아 왕자들 사이에 음모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다. 샤 아바스는 오스만 술탄들 처럼 남자들을 살해해버리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어린 왕자들을 후궁에 가두어버리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들은 우유부단하고 고위 성직자들에게 좌지우지되는 나약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샤 솔탄 후사인 때에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사파위 왕조의 한 가신이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솔탄 호세인을 살해했다. 아프간인의 침략으로 사파위 왕조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1723년 서부지역을 침략하여 서부 페르시아를 황폐화시켰다. 북부 호라산 출신의 나디르가 이란을 재통일하고 사파위 왕조의 왕자이던 타마스프 2세(1722~32 재위)를 왕위에 앉혔다. 나디르는 아프간인들을 몰아낸 후 동부 이란의 광대한 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타마스프를 퇴위시키고 사파위 가문의 다른 인물을 왕위에 앉혔다가, 1736년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 페르시아와 오스만 간의 적대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보다 온건한 형태의 시아파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나디르는 재정이 바닥나자 1738~39년 인도 원정에 나섰다. 그가 델리를 정복하고 무굴 황제의 보물을 노획해온 덕에 이란은 3년 동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의 인도 원정은 재정문제를 일시나마 해결해주었다. 1747년 나디르는 살해되었고 그의 사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호라산에서는 샤 로흐가, 마잔데란에서는 카자르족의 족장 모하마드 하산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자드 칸이 할거했다. 그러다가 이란 북서부에서 모하마드 하산이 아프간 잔여 세력들을 모두 몰아냈지만 남부와 중앙 이란에서 일어난 잔드 왕조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잔드 왕조(1750~79)

카림 칸 잔드 모하마드는 샤 솔탄 호세인 사파위의 손자인 아부 타라브를 에스마일 3세로 내세우고 자신은 섭정 혹은 대리인(vakil)으로서 통치했다. 그는 시라즈를 수도로 삼고 있으면서도 호라산의 패권을 놓고 샤 로흐와 다투지 않았다. 그는 파르스와 중앙 이란에 총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엘부르즈 산맥 북쪽 만잔데란의 카자르 왕조까지도 세력권에 포함되었다. 그는 모하마드 하산 카자르의 지배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에 쐐기를 박은 후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를 시라즈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인질로 잡아두었다. 카림 칸의 온정과 관대한 성격 덕분에 페르시아는 잠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시라즈에서 상업의 번창에 주력했다. 1779년 카림 캄이 죽은 뒤 아가 모하마드는 카자르 부족에게 도망가서 큰 부대를 모아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카자르 왕조(1779~1925)

1779~89년 잔드 왕조는 왕위계승문제로 내분이 일었다. 결국 로트프 알리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아가 모하마드 칸의 가차없는 추격을 받다가 1794년에 살해되었다. 아가 모하마드는 1796년 왕위에 올랐고 같은 해 마슈하드도 점령했다. 침체한 페르시아의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던 카림 칸의 노력은 그의 후계자들의 왕위다툼 과정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1800년 인도에서 영국인 사절이 다녀간 후 아가 모하마드는 페르시아 만 무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사).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페르시아의 지금(地金)이 인도로 흘러들어가는 길을 터준 결과를 낳았다.

파트흐 알리 샤(1797~1834 재위)는 재정을 영국 지원금에 의존했지만 1813년에는 카프카스 산맥을, 1828년에는 투르크만차이를 러시아에 빼앗겼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이후 러시아 영사와 상인들이 이란으로 들어와 영국과 이란을 놓고 외교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1907년 이란·아프가니스탄·티베트에 관한 영국-러시아 협정을 맺었다. 모하마드 샤(1834~48 재위)때에 하지 미르자 아가시는 국내 생산을 진작시키고 스페인·벨기에와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세르 옷 딘 샤(1848~96 재위)는 자원 개발을 구실로 유럽 열강들에게 특권을 팔아넘겨 일반인과 종교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는 특권을 팔아 챙긴 돈을 사적인 생활에 낭비했다.

1890년 담배특허권의 철폐를 요구하는 대중 항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통일된 대중적 항의가 전제적 왕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점과 충분한 부를 쌓은 상인계층이 종교 설교가들의 지원을 얻어 대중적 감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담배폭동'은 모자파르 옷 딘 샤(1896~1907 재위) 지배하에서 일어난 입헌혁명의 서곡이 되었다. 이란은 복본위제가 실패한 후 은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은이 국외로 유출되고 동화(銅貨)가 늘어나자 빵폭동이 일어났다. 1906년 결국 왕은 입헌을 수락했고 10월에 제1회 국가평의회(the Majles)가 열렸다. 1908년 모하마드 알리 샤(1907~09 재위)의 통치하에서 국가평의회는 탄압을 받았고 모하마드 알리를 실각시킨 내전을 치른 후 다시 열렸다. 1921년 페르시아 코사크 기병대의 이란인 장교였던 레자 칸은 정치작가 사이이드 지아 옷 딘 타바타바이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대를 장악했다. 그는 1921~25년에 아흐마드 샤 밑에서 국방장관 겸 총리로 있으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고 마침내 레자 샤 팔라비의 이름으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팔라비 왕조(1925~79)

레자 샤 팔라비는 교육과 사법면에서 종교의 영향을 약화시키는 개혁을 단행하고 근대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외국의 정치 간섭을 배제하고 1933년 영국회사가 갖고 있던 석유특허권에 관한 조항을 개정했다. 1938년에는 이란에 최초로 철도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역상의 필요에서 나치 독일편에 가담했던 일이 화근이 되어 1941년 영국-소련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다. 그가 의리상 이란에 있는 수많은 독일인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도 거절하자 두 나라가 이란을 통해 소련 전선으로 미국의 군사물자를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한 명목으로 이란을 침범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1941년 9월 레자 샤는 퇴위하고 이란을 떠났다. 그는 1944년 남아프리카에서 죽었다. 레자 샤의 아들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왕위에 오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점령 상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서 회생하기 위한 노력과 또 한편 왕권과 지주들 사이의 싸움에 착수했다. 지주들은 레자 샤 퇴위 후 국가평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51년 국가평의회는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발의한 석유국유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석유회사도 철수했다. 그러나 모사데크가 총리로 있는 동안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서방의 석유회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사정으로 인해 국유화조치는 값비싼 대가만 치룬 실속없는 승리가 되었다. 모사데크는 1953년 실각했다.

1961년 모하마드 레자 샤는 마침내 주도권을 잡고 제20차 국가평의회를 해산하고 토지개혁을 위한 길을 터 놓았다. 소수의 특권층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를 국가에 반환하고 국가는 이것을 경작자들에게 재분배했다. 산업에서 이윤분배제가 도입되어 이전의 지주들은 산업에 참여한 대가의 형태로 보상을 받았다. 경작자들과 노동자들에게 정치참여의 길을 넓혀주었고 농촌에서는 협동조합이 옛 지주의 역할을 대신 담당했다. 문맹을 감소시키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교육이 성직자들의 통제에서 더욱 벗어났다. 이것이 소위 '백색혁명'이었다. 1971년 토지분배가 끝났을 때 약 25만 가구가 이 개혁의 혜택을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토지개혁, 여성에 관한 법률개정, 정부와 왕실권한의 확대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3년 로훌라 무사위 호메이니가 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연설을 하여 구속되자 소요가 발생했다. 소요는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호메이니는 추방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터키로, 다음에는 이라크로 쫓겨났다.

이슬람 공화국

백색혁명 과정에서 농업과 산업에서 개혁이 너무 급속히 진행되고 시행상에 오류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1978년의 시위로 발전했다. 이 시위로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9월에는 주요도시들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망명중인 호메이니는 왕의 퇴위를 요구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왕은 망명길에 올랐다. 같은 해 2월에 전국민의 환호 속에 호메이니가 이란에 도착했다. 4월 1일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이슬람 국가의 이상을 반영시킨 새 헌법이 발효되었다.

- 출처 : 엠파스 -

by intercrow | 2007/04/15 19:59 | 역사 | 트랙백(6)

맥속도향상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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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몇가지 성능향상 팁

이름: dizzy

Date: 2006-11-30 01:50Read: 1659 / Vote: 4





추천 하신분들 (4분) SaKuRaHoLiC , DaeJeKook , 사과와 창문 , 파파게노









대부분 Onyx나 Mainmenu등에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만....
정리해둔 것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대부분은 default write명령, default read명령: 초기설정치 체크
sudo - 모든계정사용자에 영향.

1. UI 향상, CPU사용 감소 - beamsynch 비활성

sudo defaults write /Library/Preferences/com.apple.windowserver Compositor -dict deferredUpdates 0

0 = disable beamsync
1 = Auto beamsync
2 = force beamsync

2. 실행속도, 냉각향상

sudo nano /Library/Preferences/SystemConfiguration/com.apple.Boot.plist

커서를 옮겨 다음을 추가
kernel strings
fn=3

3. dmg이미지 마운트시 확인 건너뜀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rameworks.diskimages skip-verify true

4. 빠른 네트워크전송 IPV6 비활성

시스템환경설정의 네트워크에서 ipv6 비활성체크

5. 대쉬보드 비활성 메모리절약

sudo defaults write com.apple.dashboard mcx-disabled -boolean YES
killall Dock - 바로 실행
복구는 강제종료에서 파인더재설치

6. 사파리

sudo defaults write com.apple.Safari WebKitInitialTimedLayoutDelay -float 0

7. 키 바꿈

Ctrl키와 Alt키를 바꿈 - 시스템환경설정-키보드마우스-키보드탭에서 키변경.

8. 어플리케이션 실행시 에니메이션없앰 speed up

sudo defaults write com.apple.dock launchanim -boolean NO

9. 데스크탑의 아이콘없앰 speed up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CreateDesktop FALSE

10. 확대효과 제거 - Gui speedup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ZoomRects -boolean NO

11. 사파리 북마크아이콘 제거

find $HOME/Library/Safari/Icons -type f -atime +30 -name "*.cache" -print -d

12. 열린어플리케이션아이콘의 파란화살표

sudo defaults write com.apple.dock showforeground true

13. 투명 터미널

sudo defaults write com.apple.Terminal TerminalOpaqueness 0.8

14. 파인더 애니메이션 비활성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DisableAllAnimations true

15. 독에 숨겨진윈도우 투명

sudo defaults write com.apple.dock showhidden -bool true

16. spotlight에서 아이포드의 노래검색 복사

sudo mdimport -f /Volumes/[iPod Name]/iPod_control/

17. 데스크탑에 볼륨 보임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Desktop.HasLocalVolumes 1

18. 데스크탑에 휴지통 보임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Desktop.HasTrash 1

19. 가능한 해상도 보임

sudo defaults write NSGlobalDomain NSEnableShowAllDisplayModes YES

20. 스타일 변화

sudo defaults write NSGlobalDomain NSInterfaceStyle nextstep
주의 : crash일때 regular mac 으로

21. 툴바 없앰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FileViewer.Toolbar 0

22. 데스크탑아이콘 이름색깔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Desktop.HasDarkBackground 0

23. 파인터 메뉴quit

sudo defaults write com.apple.Finder QuitMenuItem 1

24. 사파리메뉴추가

sudo defaults write com.apple.Safari IncludeDebugMenu 1

by intercrow | 2007/03/22 14:21 | Mac | 트랙백(3)

맥초보를 위한 아주 기초적인 팁 모음!! (이것만 알아도 초보 탈출)

처음 맥을 접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즉 중복이 제일 심한 질문과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짧게 정리해보았습니다.
링크 걸어둔 글은 미처 글쓴 분의 양해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래에 글만 다 읽으셔도 가장 기초적인 질문했다고 검색해보라는 소리에 서운하지 않아서 좋고
아울러 스텝분들은 한 답변 또하고 또하고 하는 수고 안하셔서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TIP들은 정말 기초중에 기초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과 많은 자료를 원하시면 검색하시면 될겁니다.
다 카페에 있거든요^^


일단은 이번엔 맥OS 관련 팁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시간나는대로 부트캠프(패러럴즈) 및 XP 관련 팁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카페 글쓰기                 2. 프로그램설치및 제거           3. 부팅음(시동음) 제거          4. 인터넷 동영상

5. 인터넷 강의                 6. 시작드라이브                   7. 네스팟 , Sk win사용               8. 제품등록과 시리얼

9. 생산주차 확인             10. 프로그램 종료                 11. Avi파일과 자막              12. 아이콘및 테마변경

13. 맥용 프로그램           14. 싸이월드 관련                  15. 대쉬보드 위젯                 16. 맥용 메신저
17. 맥용 압축프로그램      18. 맥용 영한사전                  19. CD굽기                       20. 인터넷뱅킹과 결제
21. A/S 관련                22. 리모컨기능 확장               23. 맥 단축키                     24. virturedesktop
25. 맥용 p2p                26. 유료 프로그램(iwork)        27. 부트캠프와 페러럴즈         28. 프로그램 실행
29. 맥북의 발열              30. 오프라인매장 학생할인        31. 로그인시 프로그램실행      32. 맥북의 하드용량
33. 맥북 인터넷구매         34. 맥북의 소음




1. [맥OS] 사파리로 네이버 카페 글쓰기가 안돼요.


->사파리로는 네이버 글쓰기가 안됩니다. 네이버가 표준을 지키지 않는지라.
파이어 폭스(www.mozilla.or.kr)나 오페라(http://www.opera.com)로는 가능하니
파이어폭스나 오페라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무료로 다운 받으시고 확장 기능과 테마기능을 즐기신 다음 마음껏 카페에 글을 남겨보세요.
네이버 자료실에 다 있습니다.
오페라는 그냥 영문판 설치하셔도 한글판으로 되더군요~설치만 영문인듯.

 

참고로 맥용 인터넷 브라우저로는 다음과 같은 종류들이 있습니다.

각 브라우저의 장단점은 따로 리뷰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 사파리 (Sapari)

2. 파이어폭스(firefox) -> http://www.mozilla.or.kr/

3. 오페라(opera) -> http://www.opera.com/

4. 카미노(Camino) http://www.caminobrowser.org/

5. 시라(shira)-> http://hmdt-web.net/shiira/en.php
6. Flock->http://www.flock.com/

7. omniweb ->http://www.omnigroup.com/applications/omniweb/

 

이 정도가 대표적인 맥용 인터넷 브라우져입니다.

더 많은 브라우져를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타고 들어가보세요.

대략 100개정도 있습니다 -_-;;

http://darrel.knutson.com/mac/www/browsers.html



2. [맥OS] 프로그램 설치와 제거는 어떻게 하죠?


->맥에는 따로 설치와 제거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dmg파일 더블클릭하시고 가상폴더가 생성되면
거기있는 이미지를 응용프로그램 폴더로 드래그 하시면 설치가 끝나고

반대로 제거시 응용프로그램 폴더에 
아이콘을 휴지통으로 가져다 버리시면 제거가 됩니다.

물론 설치후 dmg파일은 버리시고
가상폴더도 휴지통으로 이동해서 추출하시면 되요.



3.[맥OS] 도서관에서 사용하는데 부팅음(시동음)이 신경쓰여요.

->컴퓨터를 켤때 띵~~하는 소리가 거슬리시다면

http://cafe.naver.com/inmacbook/1796
윗글을 참고하세요.



4.[맥OS] 맥에서는 인터넷 동영상을 볼수 없나요?


->보통 인터넷 파일의 경우 윈도우미디어 기반의 파일(wma)파일이 대부분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다운로드 탭에 가셔서 mac/other platform 으로 들어가시면 제일 위쪽에
Flip4mac이라고 있으니 그걸 다운 받으셔서 설치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맥용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도 있으니 그것도 설치해보시길~
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www.microsoft.com/downloads/Browse.aspx?displaylang=en&categoryid=5


5.[맥OS] 맥으로 인터넷 강의를 들을 수는 없나요?


->대부분의 한국 사이트들은 MS식민지라서 엑티브엑스를 설치하여야 인터넷 강의를
들을 수 있는데 익스플로어에서만 그게 되죠. 아쉽게도 인터넷 강의를 맥으로 들을수는
없습니다. 부트캠프로 돌리는 수밖에요.
윈도우 비스타가 출시되면 해킹 방지등을 위해 엑티브엑스의 사용자체가 안될거라고 합니다.

그럴경우 맥에서도 되는 사이트나 프로그램이 많아지길 기대해 볼수도 있겠죠.


6.[맥OS] 부트캠프를 설치했더니 XP로만 부팅돼요.


->OPTION키를 부팅씨 꾹 누르고 계세요.
그리고 시작드라이버를 바꾸시려면 맥의 시스템 환경설정이나
xp의 제어판에 들어가셔서 시작드라이브를 바꿔주시면 됩니다.



7.[맥OS] 맥에서는 네스팟사용이 불가능한가요? SK win사용은 어떻게 하나요?


->가능합니다. 단지 네스팟사이트에 들어가셔서 맥 어드레스를 받으셔야 합니다.
네스팟사이트 들어가셔서 로그인 하시고 맥 인증방식으로 변경하세요.

http://www.megapass.net/service/nespot/IN_PinesuseW.php

 

맥 어드레스는 좌측 상단의 사과클릭 -> 시스템 환경설정 -> 네트워크" 로

들어가셔서 airport 탭에서 00:17:f2:26:95:00 이런형식으로 되어있는겁니다.

":"을 제외하고 입력해 주시면 됩니다.

Sk win 역시 XP 사용시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맥에서는 안 깔리죠^^ 아래와 같이 설정하시면 됩니다.

단 100%잡히지는 않고 잡혔다 안 잡혔다 그럽니다.

또 문제는 일정 시간 인터넷 사용하지 않으면 접속이 끊어져 다시 연결해줘야하죠

http://cafe.naver.com/inmacbook/2832


8.[맥OS] 맥북 제품 등록하려는데 시리얼번호는 어디서 알수 있나요?


->맥북 받으실때 상자 옆면에 적혀있습니다. 4H627...이런 형식으로 말이죠.
맥os서 확인하고 싶으시면 좌측위의 사과를 누르시고 이 매킨토시에 관하여에
들어가신뒤 버젼을 두번 클릭하시면 일련번호가 나옵니다.
제품등록은 애플 홈페이지 맨 아래쪽을 찾아보시면 등록하는 곳이 보일거예요.



9.[맥OS] 구입한 제품이 몇주차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위에서 확인한 시리얼 번호를 보면 4H627..이런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6은 생산년도이고
그다음은 두자리 숫자가 몇주차인지 나타내어줍니다.

가령 위의 시리얼의 경우 2006년 27주차 제품이 되겠죠.



10.[맥OS]창을 완전히 닫았는데 프로그램이 종료되지 않습니다.
->맥에서 프로그램을 완전히 종료하기 위해선 cmd(좌측사과버튼) +Q을 입력하셔야 합니다.



11.[맥OS]퀵타임에서 AVI파일이 재생되지 않습니다.


->퀵타임에서 AVI (DIVX)파일은 완벽하게 지원되지 않습니다.

화면에 깨지면서 소리가 나지않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Mplayer나 VLC를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영화감상시 한글자막을 보시고 싶으시면 아랫글을 참조하세요.
http://cafe.naver.com/inmacbook/3969


 

그리고 Avi를 퀵타임에서 재생하기위한 코덱들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으세요.

물론 아래 코덱들도 일정한 파일 재생할때만 읽을 수 있습니다.

3vix -> http://www.3ivx.com/download/macos.html

AC3 -> http://mac.softpedia.com/get/Audio/AC3-Codec.shtml

Xvid -> http://osx.iusethis.com/app/xvidquicktimecomponent



12.[맥OS] 맥에서 아이콘과 테마를 변경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


->일단 아이콘을 다운로드 받으시고 압축을 푸신후 아이콘을 베끼기(cmd+c)하시고
변경할 파일 클릭후 정보입수 하신다음 위쪽에 작은 아이콘을 클릭하시뒤 붙여넣기(cmd+v)를
하시면 됩니다.
아이콘을 다운 받으시고 싶으면
http://interfacelift.com 을 추천합니다. 윈도우용 맥용 아이콘과 배경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시스템과 관련된 프로그램의 아이콘(파인더나 대쉬보드, 휴지통)은
캔디바라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셔야 됩니다.
상용프로그램이므로 개인적으로 구하시길.


그리고 타이거에서 맥의 테마 변경프로그램인 shapeshifter이용해서 테마를 바꿔줄 수 있습니다.

15일동안  무료로  체험이 가능하고 그후 20달러에 구매가 가능합니다.

관련 테마는 위 사이트에서 역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다운로드는 아래 사이트에서 가능합니다.

http://www.unsanity.com/haxies/shapeshifter





13.[맥OS] 윈도우용 포토샵이나 한글은 맥에서 못 쓰나요?


->네. 맥용 포토샵이나 맥용 한글은 따로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역시 맥용 스타크래프트가 따로 있습니다.
MS 오피스 프로그램도 맥용은 따로 있구요.

한글은 2006년판 오피스는 2004년판이 최신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14.[맥OS] 싸이월드 배경음악이 나오지 않아요. 미니홈피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

싸이월드의 경우 웹표준을 지키는게 아니라서요.

싸이월드 배경음은 익스플로어에서만 재생됩니다. 맥으로는 들으실 수 없어요.

예전에 BGM방식에서 엑티브엑스를 이용한 플레이어 방식으로 바뀌었죠.
파이어폭스를 사용하시는데 미니홈피의 플래쉬 파일이 보이지 않거나 배경스킨이 나오지 않는다면
모질라 한국사이트에 들어가셔서 제품소개->한글확장기능소개로 들어가시면 싸이월드관련 확장지원을
쉽게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창 좌측에 선호순위 5위안에 있으므로.)

싸이월드 확장 바로가기(파이어폭스 사용자만)

-> http://update.mozilla.or.kr/addons/?p=384&application=firefox&addonType=extension



3월에 싸이월드2가 출시되면 엑티브 엑스등을 이용하지 않고 모든 브라우저에서

구동이 가능하게끔 만들어 맥에서도 불편함이 없어진다고 하니

조금 더 기다리시면 싸이월드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맥라이프가 될겁니다.




15.[맥OS] 대쉬 보드 위젯은 어디서 다운받고 설치/제거는 어떻게 하나요?


위젯은 애플 홈페이지의 OS X탭에서 Downloads로 들어가시면 수천개의 위젯이 있고
다운 받으셔서 더블클릭하신후 설치하시면 대쉬보드에 설치됩니다.
대쉬보드 창에서 지우시려면 옵션키를 누르면서 마우스를  위젯에 대면 왼쪽위에 X표시가 나오고
위젯을 관리하시려면 좌측 아래쪽에 +키를 누르시면 됩니다.
완전히 삭제하고 싶으시면 맥 하드에서 사용자이름/라이브러리/위젯으로 들어가시면
파일들이 있습니다.
대쉬보드 위젯설치와 관련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http://cafe.naver.com/inmacbook/1496

그리고 XP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내고 싶으시다면 야후 위젯을 다운 받으세요.

자세한 설명은 아랫글을 참고.

http://cafe.naver.com/inmacbook/10638



 


16.[맥OS]맥용 매신저는 어떤것이 있고 네이트온이 가능한가요?


->네이트온은 맥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올 연말을 목표로 맥용 네이트온을 개발한다고 했지만

2007년이 코앞이군요. 만들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바를 이용한 Jate o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네이트온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데 (대화,쪽지, 접속여부등)
이것도 정말 감지덕지라 생각합니다.
아래 사이트에서 가입하시고 맥용(게시글 맨 아래쪽 최근덧글에 위치)을
다운로드 받으셔서 응용프로그램에서 압축 푸시고 실행시키시면 됩니다.
http://jateon.kfmes.com/index.php



다른 메신저로는 맥용 MSN이 제일 무난합니다.

윈도우에서 만큼의 기능 (화상, 문자)등은 지원되지 않습니다.
MSN홈페이지에서 맥용으로 다운로드 받으세요.

<MSN다운로드 바로가기>

->http://www.microsoft.com/downloads/details.aspx?FamilyID=ebebfc87-69fd-4d74-bc83-ea7faace66a0&DisplayLang=en

 

그리고 아이챗과 스카이프가 많이 사용됩니다. .MAC은 유료(60일체험)지만 그 이후에도 아이챗은 무료입니다.

맥사용자만 이용가능하구요. 스카이프의 경우 전세계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상채팅 프로그램중에
하나입니다. 인터넷 전화기능도 겸하고 있구요. 아래로 들어가보세요.
http://skype.co.kr



17.[맥OS] 맥에서 압축 프로그램은 어떻게 푸나요???


->Stuffit expander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Stuffit deluxe라는 프로그램을 찾아보세요.
아울러 알집 파일은 코코알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풀 수 있습니다. 아랫글 참조
http://cafe.naver.com/inmacbook/1344




18.[맥OS]응용프로그램의 사전은 영영사전이던데 영한 사전은 없나요?


코코아사전이라고 있습니다. 한영/영한 다 됩니다. 아랫글 참조
http://www.wangsy.com/project/cocoadic/




19.[맥OS]맥에서는 CD를 어떻게 굽나요? 구운시디를 윈도우에서 쓸 수 있나요?


->Toast Titanium 7.1 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시면 손쉽게 구우실 수 있고

윈도우 겸용여부는 프로그램에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20. [맥OS]맥에서의 인터넷 결제와 인터넷 뱅킹이 가능한가요?


->맥에서 인터넷 뱅킹은 현재 신한은행만 가능합니다.

타 은행의 경우 공인인증서등의 문제로 맥에서 사용이 불가능하고
인터넷 카드결제 역시 일부 카드사에 제한되어져있습니다.
부트캠프를 이용하서야 하고 부트캠프 이용시 안심결제등 일부
결제프로그램은 애플키보드서포트와 부딪혀 오류를 발생시킵니다.


인터넷 결제시는 안전하게 아범 피씨를 이용하세요.

한게임이나 기타 결제사이트에서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 함부로 설치했다가

먹통되는 수가 있습니다. 키보드 마우스가 다 안 먹히게 되죠.

키보드 관련된 액티스엑스는  될 수 있으면 설치마세요.

부트캠프 업데이트 이후 어느정도 해소된 부분이 있지만 여전히

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으니까요.

불가피하게 이용시 해킹 방지 프로그램은 깔지 마시고 꼭 필요하시다면

사용시 키보드 관련 프로그램들은 꺼두세요.


 

가령 엘지카드의 경우엔 엑티브엑스를 설치해도 결제가 되는 반면에

비씨카드의 안심결제는 설치하지 않으면 다음화면으로 안 넘어가고

설치하고 나면 결제 도중 컴터가 먹통이 되면서 재부팅후 키보드가

말을 안 듣기 시작합니다.


 


21.[맥OS]한국에서 맥북을 샀는데 미국에서 서비스가 가능할까요?

->애플은 월드 워렌티입니다. 애플 서비스센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던 가능합니다. 물론 회화가 되야겠죠 ㅎㅎ




22.[맥OS] 리모컨의 기능은 고작 음악, 동영상, 사진을 보는것 뿐인가요?

->아닙니다. 프로그램에 의한 확장이 가능합니다.
Remote buddy라는 프로그램은 이용하시면 됩니다. 60일 체험판을
쉽게 구하실 수 있을겁니다. 60일 이후에도 사용하고 싶으시면
카페를 잘 검색해보시거나 하나 사시길~ 다운로드는 아랫글 참조요.
http://cafe.naver.com/inmacbook/3482



23. 한영키가 없는데 맥에서 한영변환은 어떻게 하나요?


-> cmd(좌측 사과)+ 스페이스바입니다.
더 많은 단축키가 궁금하시면 아래글을 참조하세요.
http://cafe.naver.com/inmacbook/1133




24.인터넷으로 보니까 화면이 막 전환되고 툭치니까 움직이던데 그건 뭔가요?

-> Virtuedesktop이라는 프리웨어입니다.
설치후 설정해서 센서부분체크해주시면 툭치면 넘어가는데
맥북을 아끼신다면 그리 추천해드리고 싶진 않군요 ㅎㅎ
아래에서 무료 다운로드 받으세요.
http://virtuedesktops.info/



25. 맥용 P2P 프로그램으로는 어떤게 있나요?


일단 한국사이트 중에 폴더플러스가 맥전용 프로그램을 지원합니다.

http://www.folderplus.com/?fpMain=4&fpSub=2

외국 P2P경우 동키등이 결국 음반협회의 압력에 망해서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고
라임와이어등이 남아있습니다.
속도는 보장하지 못하지만 팝송등을 다운로드받을때 유용합니다.
http://www.limewire.com/english/content/home.shtml
또는 Poisoned 나 Acquisition 는
구글에서 검색해서 다운로드 받으세요.

Poisoned->http://www.poisonedproject.com/

Acquisition-> http://www.acquisitionx.com/

 


26. 맥에 깔려있는 프로그램들이 씨리얼번호를 요구하네요 ?? -_-


->깔려있는 퀵타임이나 키노트 같은 경우는 기능이 한정적입니다. trial 버젼들이죠.
모든 기능을 이용하기 위해서 구입을 하셔서 씨리얼 번호를 입력해야 합니다.
씨리얼번호를 가르쳐주세요라는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27. XP는 부트캠프로 밖에 못 돌리나요?

 

->아닙니다. 부트캠프외에 페러럴즈와 크로스오버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재부팅 없이 맥상에서 XP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페러럴즈의 경우 맥상에서 윈도우창을 새로 띄우고

크로스 오버의 경우는 그냥 맥 화면 위에 윈도우 프로그램을 띄워주는데

한글지원도 되지 않고 아직까지는 베타버젼입니다.

참고로 릿님이 저번 워크샵에서 말씀하시기리 페러럴즈를 원활히 돌릴려면
메모리가 최소한 700M는 되야한다고 하셔서 램이 1.25G는 되야할것 같습니다.

페러럴즈 관련 리뷰는 "치우"님이 올려주셨습니다.

검색 창에 "치우"라고 치시면 나옵니다. (작성자검색)         

부트캠프 설치는 아랫 링크를 참조하세요. (출처 :파스텔님)

http://kmug.co.kr/board/zboard.php?id=review&no=17    


 

 

28. 프로그램을 실행했는데 창이 안 떠요.

 

->일부 프로그램의 경우 (크로스오버등) 그럴 수 있습니다.

작업 표시줄을 보면 파인더에서 실행프로그램으로 바뀌어있을겁니다.

새로운 작업이나 파일을 오픈하시면 아마 프로그램이 실행될 겁니다.

 

 

 

29. 맥북 하판이 너무 뜨거워요.

 

->10.4.6 이하버젼으로 설치되어있으면 소음이 적은 대신 발열이 심할 수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10.4.8로 업데이트 해주시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시는게 좋습니다.

대신 업데이트는 팬이 좀 더 자주 돌아가는 만큼 소음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30. a# 이나 백화점 애플 전문매장등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학생할인이 가능한가요?

 

->애플의 학생할인은 온라인 매장에서만 가능하며

할인율은 5%입니다. 대학생도 해당되며 학생증 사본(팩스, 스캔)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아이팟 제품군은 교육용이 아닌지라

학생할인 품목에서 제외됩니다.

학생할인을 받으실 예정이라면 1년에 두번정도 신상품 출시전에 있는

아카데미 프로모션을 이용하여 맥과 아이팟을 조금 더 싸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눈여겨 보세요.

 

 

31. 로그인시 자꾸 일정 프로그램들이 실행됩니다.

 

->아마도 프로그램을 "로그인시 열기"로 지정해두셔서 그런걸 겁니다.

독에 있는 아이콘을 몇초간 클릭하시거나 우클릭하셔서 "로그인시 열기"에

체크되어 있는 것을 해제해 주시면 됩니다.

 

 

32. 맥 구매시 용량과 실제 용량에 차이가 있어요.

 

->맥 OS인 타이거의 용량이 대략 20GB정도 차지합니다.

필요없는 프로그램은 과감히 지우시는게 좋습니다.

아니면 설치시 선택하실 수도 있구요.

본인이 사용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드라이버들을

삭제하시면 훨씬 날씨해진 타이거를 만나실 수 있을거에요.

 

 

33. 인터넷에서 파는 맥북이 너무 싼데 믿고 사도 될까요?

 

->기본적으로 애플은 정가제입니다. 할인쿠폰이나 이벤트에 의한 할인을 가능하지만

지나친 할인은 의심해볼만합니다.

GS나 Lotte, 신세계 이런 대형 인터넷 쇼핑몰의 경우야 설사 사기라도 환불이나 교환이 보장되지만

소규모 사이트 경우에는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사기를 당한 사례도 있구요.

쇼핑몰에서 사실때는 홈쇼핑 맨 하단에 있는

사업자 등록번호를 조회해 보세요.

국세청 홈페이지 아래쪽 중간에 보시면"사업자유형/휴폐업조회"가

있습니다.

없는 번호거나 생긴지 얼마 안된 사이트라면

절대 구매하지 마세요. 사기당할 확률이 120%입니다.

그리고 맥북 사실때 10%퍼센트 이상으로 싼 가격이라면

한번쯤 의심해 보는것이 좋습니다.

 

 

34. 발열 또는 소음 때문에 미치겠어요!!

 

->

맥북의 발열은 유명하죠. 팬이 가끔 미친듯이 돌 때도 있구요.

펌웨어 등을 통해서 나아지긴했지만 팬이 도는 주기도 일정치 않고

조절하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중요한건 발열과 소음의 적정선을 찾는 것이겠죠.

 

기본적으로 맥북의 팬 도는 속도는 1500rpm입니다.

그 속도로 돌면 평소에는 매우 조용하죠.

그런데 한번 돌기 시작하면 6000rpm을 넘어서며 굉음을 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 더욱더 심하구요.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팬의 속도를 프로그램으로 조절해주는 겁니다.

Smc 팬컨트롤러의 경우는 어플리케이션이고 Fan control의 경우는

시스템 환경설정에 등록되어집니다.(mcfuture님의 글 퍼옴)

 

어떤 것을 쓰셔도 무방한데 3000rpm으로 맞춰두시는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3500 rpm 이상으로 설정하시면 온도는

더 내려가지만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듣기 싫은 소음은 대략 4000rpm이 넘어가면서 생기구요. 

3000rpm 이하로 맞추시면 또 발열이 심하구요.

3000rpm으로 맞춰두시면 50도 정도에서 오락가락하며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여러편 보지 않는 이상

미칠듯이 도는 일은 없더군요.

그리고 맨 아래의 링크 NHC는 XP에서 팬을 컨트롤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시원아빠(talron97) 님께서 올려주셨습니다. (http://cafe.naver.com/inmacbook/6384)

 

Fan control-> http://cafe.naver.com/inmacbook/5349

smcFanControl -> http://cafe.naver.com/inmacbook/4826

nhc-> http://www.pbus-167.com/nhc/nhc.htm

 

 



일단 생각나는데로 써보았습니다.
빠진게 있으면 댓글로 추가해 주시고
또 다른게 생각나면 수정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자료가 필요하시면 카페와 클럽박스를 검색해보고
상용프로그램은 알아서 구하는게 좋겠죠^^

위의 사항에서 좀 더 궁금하신게 있으시면 검색해보시거나 쪽지주세요.

 

네이버 맥북을쓰는사람들 클럽에서 퍼옴

애이불비(monynu) 님의 글

by intercrow | 2007/03/21 22:39 | Mac | 트랙백(11)

서체관련

질문1. 서체 관리자를 띄웠더니, 폰트가 User 와 Computer 두 군데 나뉘어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나뉘어 있는거죠?

             

              그 차이는?
   

              꼭 나눌 필요가 없다면 모두 컴퓨터에 넣고 써도 되는 것 아닌가요?


 

▶ User와 Computer는 폰트를 나누어 저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단지 시스템에 설치된 것과 그 특정 유저의 폰트 폴더에 설치된 것을 나누어 보여주는 것 뿐 입니다.

 

    서체가 들어가는 곳은 클래식을 제외하면 세 곳입니다.

 

    (1) /system/library/fonts

 

    (2) /library/fonts

 

    (3) /user/*****/library/fonts

 

        (1)번은 중요한 시스템 폰트가 들어가는 곳으로서 건드리면 안되고, 웬만하면 여기에 폰트를 넣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2)번이 폰트를 넣는 주된 공간입니다. 웬만하면 여기다 넣는 것이 좋습니다.

 

        (3)번도 폰트를 넣는 공간입니다만, 여기 넣을 경우는 그 유저 외의 다른 사람이 다른 계정으로 로그인했을 경우는사용

 

         불가능합니다.

 

 

       만약 (3)번과 (2)번에 같은 폰트가 중복되어 들어 있다면 (3)번의 것을 지워

 

    주어무방합니다.

 

 

      단순한 디스크 공간 낭비가 맞습니다.

 

      그러나, 두 파일이 완전히 동일한 것인지를 반드시 "저 폴더들을 열어서" 확인한 후에 지워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Font Book은 서체를 "관리하는" 근본적인 유틸리티가 아니라 단지 조금 더 편하게 관리하게 해 주고 서체를 "보여주는" 유틸리티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룹별로 정리하게 해 주는 편리한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서체 자체를 옮기는 것은 아닙니다.

 

      서체를 넣고 뺄 때 Font Book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폴더를 열어서 거기다 넣어 주면 됩니다.

 

      일부 서체의 경우는 락이 걸려 있어서 유저 폴더에만 설치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서체는 모두 (2)에

 

    다가 넣어도 됩니다.

 

 

 

 

 

질문2) 폰트설치후 시동이 안되요 ㅠㅠ

 

 

              : shift를 누른체 시동하면 확장파일이 꺼집니다.

 

            확장파일끄고 자형정리하세요..

 

            자형이 너무 많으면 생기는 현상 ^^

 

 

          * OSX의 정품 폰트를 구매합시다..^*^

 

네이버 맥북을쓰는사람들에서 퍼옴...

by intercrow | 2007/03/21 22:29 | Mac | 트랙백(4)

맥세팅

맥은 쉽고 편리하지만 미숙한 한글 처리 및 국내 실정에 적합하지 않은 점이 많다. 게다가 한글로 된 강력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국내에서 맥의 진입장벽을 낮추지 못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문서에는 Mac OS X 처음 사용시 필요한 필수 유틸리티와 개발 도구, 기타 설정등을 상세히 정리하여 초보자도 쉽게 접근하고 보다 편리하게 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참고로 맥의 언어 시스템은 아직까지는 “영문 상위”를 추천한다.

유틸리티(Utilities)

  • 블로깅 및 저널링 소프트웨어 MacJournal(상용)은 맥에서 글을 쓰는 가장 좋은 도구다. F8을 누르면 더욱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다.
  • FTP 프로그램 Cyberduck, 상당히 무거운 편이므로 FTP 디렉토리를 샅샅히 들여다 볼 경우가 아니라면 콘솔에서 ncftp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개인적으로 ncftp를 약 90%의 비율로 사용하고 있다.
  • 이기종 PC와 마우스, 키보드를 공유하기 위한 Synergy, 서버와 클라이언트간에 좌, 우측을 지정하는 간단한 conf 설정후 매우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 맥에 기본으로 포함된 압축 유틸리티(BOMArchiveHelper.app)는 한글 파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버그가 있다. The Unarchiver는 한글 파일을 문제없이 처리하며 이외에도 다양한 압축 포맷을 지원하는 기본 압축 유틸리티의 대체품이다.
  • 맥에서 한글 파일을 압축할 경우 윈도우에서 해제 하면 한글파일이 모두 깨진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파일 이름의 인코딩 방식 차이로 인한 문제인데 맥에서 압축한 zip 파일을 윈도우에서 풀어주는 한글 zip이 있다.1 윈도우에서 압축한 한글 파일은 위에 언급한 The Unarchiver로 문제없이 해제할 수 있다.
  • 맥에 기본으로 포함된 또 다른 유틸리티 Preview.app는 이미지, PDF 뷰어로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다른 대체품을 설치할 수 있다. 빠르게 이미지를 보는 Xee, PDF 뷰어 Adobe Reader.
  • GMail 사용자는 Google Notifier for Mac을 통해 GMail 수신여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 통합 메신저 Adium, GAIM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MSN 및 Jabber 프로토콜을 지원한다. Microsoft Messenger for Mac도 좋지만 Google Talk등과 호환되어야 한다면 Adium이 편리하다.
  • 오피스 파일을 보기 위한 뷰어가 일부 있으나 완전하지 않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Office 2004 for Mac(상용) 설치를 추천한다.
  • 동영상 플레이어로 VLC를 추천한다. 약간의 설정을 통해 VLC 아이콘을 미려하게 바꿀 수 있으며 한글 자막도 문제 없이 볼 수 있다.
  • P2P 프로그램으로 eDonkey보다는 Torrent류가 인기 있다. Transmisson이 가장 깔끔하며 Torrent 사이트로는 Demonoid를 추천한다. 초대권이 있어야 하나 한시적으로 가입을 받기도 하니 꾸준히 살펴보기 바란다. Torrent 검색 필요없이 프로그램내에서 해결하는 xTorrent(상용)도 있다.2 매우 편리하다.
  • 맥에서도 게임을 할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세컨드 라이프등을 즐길 수 있다. 단, 맥북에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최저 사양으로 실행 해야한다.
  • 아직까지는 윈도우가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하다. Parallels(상용)를 추천하며 부트캠프 이미지를 마운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장하지는 않음. 가끔씩 필요할때만 Coherence 모드를 사용하면 편리하다.
  • 맥에서 언인스톨은 Applications 디렉토리에 있는 파일을 휴지통에 끌어놓는 것으로 끝이지만 환경설정 및 캐쉬는 함께 삭제되지 않는다. AppZapper(상용)는 삭제를 도와주는 유틸리티다.
  • Clutter는 아마존에서 앨범 이미지를 가져와 iTunes에 넣어주는 프로그램이다.3

개발도구(Developer Tools)

  • 최고의 코드 편집기 TextMate(상용), 하지만 아직까지 한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버그가 있다. 임시 해결 방법 참조.
  • 개발 도구 Xcode 설치, gcc를 포함한 다양한 개발도구가 설치된다. 비개발자라도 설치해두면 나중에 쓰일 일이 있을것이다.
  • 오픈소스 유틸리티를 바이너리로 편리하게 관리하는 Fink 설치, 별도의 디렉토리 체제로 운영되므로 sudo rm -rf /sw 를 통해 간단히 삭제할 수 있다.

    • wget 설치
      fink install wget
  • 최신 소스를 받아서 컴파일 하고 관리하는 MacPorts 설치 방법, 소스를 매번 컴파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간혹 컴파일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Gentoo 리눅스를 생각하면 틀리지 않는데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한 Fink를 더 선호한다.
  • 이외에 웹 개발을 위한 Mac OS X 환경 구축 참고.

설정(Settings)

  • 공개용 한글 글꼴 ‘아리따’는 맥에 기본으로 포함된 한글 폰트가 지원하지 못하는 확장 완성형 문자 “똠방각하”등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려하며 무료이다. 맥에서 설치 방법 참조.
  • Mail.app은 맥의 또 다른 킬러 애플리케이션이다. 읽는것은 문제 없으나 아쉽게도 한글로 된 메일 발송시 타 메일 클라이언트에서 읽는것이 완전하지 않으니 read-only 사용을 추천한다. Spotlight가 메일 내용도 검색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
  • Activity Monitor의 Dock Icon을 Show CPU Usage로 설정, CPU 사용률을 실시간으로 점검할 수 있다.
  • 터미널에서 ANSI 컬러 사용을 위해 ~/.profile 수정

    export TERM="xterm-color" export CLICOLOR=1 export LSCOLORS=ExFxCxDxBxegedabagacad  alias ls="ls -v" alias ll="ls -lv"
  • 터미널에서 한글 입출력을 위해 ~/.inputrc 생성, 하지만 리눅스 원격 서버 접속시 한글 “입력”은 아직 불가능하다.

    set convert-meta off set meta-flag on set output-meta on

스크린샷(Screenshot)

My Desktop


  1. oedalpha님 감사합니다.
  2. 만박님 감사합니다.
  3. 만박님 역시 감사합니다.

by intercrow | 2007/03/18 13:46 | Mac | 트랙백(4) | 덧글(1)

베트남 그림




Dinh Quan (베트남)의 독특한 누드








Vietnamese Beauty



Tree of Life






Falling Leaves I



Falling
Leaves II



Nude I







Nude and Banana Leaf



Nude and
Banana Leaf II





Nude with
Banana Leaf III





Nude with
Parasol



Dancer





Prayer I





Prayer II





Enlightened Thoughts





Red Nude







Dreamer





Red Dreamer





Lovers





Unrevealed I







Unrevealed II





Autumn Nude





Nude With Lotus Leaf II





Resting
Woman







Vietnamese Woman

Dinh Quan was born in 1964 in Haiphong and
graduated from Hanoi Fine Arts College in 1990.
Female figures - which are
well finished and beautifully refined, surrealist rather than realistic
-
always occupy a central position in his lacquer paintings.


DrawPixelSizedText("♥ 아름다운 풍경, 꽃, 사진 ♥", 400, false)♥ 아름다운 풍경, 꽃, 사진 ♥
Add_aryTagList(aryTag,"베트남") 베트남,

by intercrow | 2007/03/10 15:23 | 객담 | 트랙백

NTFS포맷 엑세스 하기



맥 OS X에선 NTFS 지원이 제한적입니다. 읽기는 되는데 쓰기는 안되죠. 그래서 부트캠프를
쓴다거나 외장 드라이브를 들고다닐 때 FAT32를 써야 쌍방에서 쓰기 지원을 보장할 수 있는데...

리눅스에는 FUSE라고, 아무 파일시스템이든지 유저스페이스에 올릴 수 있는 프레임워크가 개발
되어서, 이것에 얹어서 쓸 수 있는 수많은 파일시스템 중에 NTFS 드라이버도 있어서 리눅스에서는
어느 정도 NTFS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하죠.

근데 이 FUSE가 맥용으로 포팅되어 MacFUSE라고 이름을 붙이고.... 구글에서 나왔습니다.
이걸 보고 부리나케 애플노바 포럼에서는 NTFS 드라이버까지 포팅하는 분이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여러 번의 테스트 릴리즈 끝에 지금은 그럭저럭 에러가 거의 없는 버전이 나왔더군요.

http://code.google.com/p/macfuse/
http://forums.applenova.com/showthread.php?t=21842&page=7 참고해보시길.

지금 나온 최신 버전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되는데...

MacFUSE-Core-0.1.9.dmg
MacFUSE Tools 0.1.7-r1.dmg
NTFS-3G 20070118.dmg

이렇게 제가 설치해봤습니다. 저 순서대로.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외장 드라이브를 윈도우
에서 NTFS로 포맷한 뒤, 드라이브 제거를 해서 깔끔하게 분리시키고 (이렇게 안 하고 그냥
드라이브를 USB포트에서 빼버리면 윈도우XP에서 에러메시지가 뜨진 않는데 비정상 분리가
되었다고 기록이 남아서 MacFUSE용 NTFS드라이버가 드라이브의 유효성을 의심해서 마운트
거부를 하더군요... 그것 땜에 삽질 좀 했음) 맥으로 가져와서 꽂아보니 마운트 성공.

정말 쓰기가 되는가 싶어서 파일 복사를 해보니... 됩니다. 근데 무.척. 느립니다. 지금 보니
대략 초당 200KB/s 정도인데 아주 돌아가시겠습니다. 흑흑... 그래도 초기 버전이라 참아
보렵니다. 성능 문제는 개선이 되겠죠.

(케퍽에 쓰고 여기도 다시 붙입니다. -ㅈ-)
_________________
First in Korea : Mac mini G4 (1.58GHz) & Mac mini Core Duo (1.66GHz)
Tool-Box에 놀러오세요!

애플포럼에서 가져옴

by intercrow | 2007/03/08 15:59 | Mac | 트랙백

미국드라마


 

출처 : 미드갤

엠파스 게시물중에서...

by intercrow | 2007/03/08 14:52 | 객담 | 트랙백

대쉬보드 사용않하기 또는 하기

 defaults write com.apple.dashboard mcx-disabled -boolean YES
(직접입력하실때 띄어쓰기랑, 대문자 구분 꼭하십시요) 그리고 재부팅하시면 대쉬보드가 off 상태입니다.
반대로 다시 살리시고 싶으시면 끝에 no 붙여서 하시면 됩니다.
 defaults write com.apple.dashboard mcx-disabled -boolean NO

네이버 맥유저카페에서 가져옴

by intercrow | 2007/03/07 13:10 | Mac | 트랙백(6)

애플 메일프로그램 속도향상방법

방법은 메일리스트 DB를 reindexing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Quit Mail.



2. Open Terminal.



3. Type the following:



cd ~/Library/Mail

sqlite3 Envelope\ Index

sqlite> vacuum subjects;



When the sqlite prompt returns, type Control-D to exit.



Restart Mail and enjoy the extra speed.


한줄짜리 버전.



terminal을 열고 다음을 입력합니다.

sqlite3 ~/Library/Mail/Envelope\ Index vacuum index;

by intercrow | 2007/03/07 13:07 | Mac | 트랙백

파이어폭스 플러그인 추가설치 사이트주소

https://addons.mozilla.org/plugins/?action=missingplugins&mimetype=text/html;%20charset=iso-8859-1&appID={ec8030f7-c20a-464f-9b0e-13a3a9e97384}&appVersion=2007021917&clientOS=PPC%20Mac%20OS%20X%20Mach-O&chromeLocale=en-US

by intercrow | 2007/03/07 13:04 | Mac | 트랙백(2)

마우스 부드럽게 하는법

마우스 부드럽게 하는법
defaults write -globalDomain com.apple.mouse.scaling -float 3.0

by intercrow | 2007/03/07 13:00 | Mac | 트랙백(17)

파폭에서 한번에 URL창 주소 전체 선택하기

머 제 파폭만 그런건지 다른분들도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혹시 몰라서 올려봅니당

파폭에서 주소창을 클릭시 전체선택이 안되고 항상 저같은경우는 더블을 해야 전체 선택이 되더라구요

은근히 불편해서 찾아봤는데

모르시는 분이 있을가 올립니다.

파폭에서 주소창에 about:config 치시고 엔터~

Filter 라고 필요 없는 항목을 걸러낼수 있는 검색창같은게 있는데

거기에 clickselectsall 을 치시면

browser.urlbar.clickselectsall 이란 항목이 나오는데요 더블 클릭하면 value가 true 로 바뀌고

파폭을 껏다 켜시면 상큼하게 원클릭에 주소 전체가 선택됩니다.

혹시 불편하셨던 분이 계셨다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네이버 맥유저카페에서 가져옴

by intercrow | 2007/03/07 06:05 | Mac | 트랙백(8)

검색에서

검색어에 제한이 걸려 있을때...

검색어 다음에 [.] 을찍어 주시면 ..

검색이 되더군요...

검색어 다음 "쩜" 입니다 "쩜"...



ps... 점이 하나로 해결 안될땐 두개를... 찍으셔도 됩디다...

by intercrow | 2007/03/07 05:57 | 객담 | 트랙백(9)

부캠 윈에서 사운드 무선랜 느려서 마우스랙 생기는 경우

맥에선 아무이상없는 사운드...

 

윈도우를 돌리면 사운드가 끊기고... 심할경우는 마우스도 순간순간 랙이 발생되는 현상을

한번쯤을 경험하셨을텐데...

 

 

그래픽설정에서 전원관리설정체크해제해주시면 어느정도 해결이 되셨을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무선랜을 사용할경우 여전히 끊김현상이 발생....

 

 

이때는 무선랜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설정해주시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무선랜을 사용하지 못하는 단점이..

 

 

근데.. 역시나 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네요...

 

사운드가 끊기는 현상은 사운드드라이버 문제가 아니고 바로 무선랜드라이버 문제더군요..

 

윈도우 자료실에 "디렌서"님이 올리신 최신버전의 무선랜드라이버를 설치하면

 

이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코어2듀오cpu일경우)

 

 

무선랜도 사용할수 있으며 끊김현상도 말끔히 해결이 됩니다.


---> 이글이 참고한 자료


출처는 ibm 입니다. 현재는 레노보죠.

버전은 6.0.2.75 입니다. 1.1.2에 들어있는 버전은 6.0.1.75 이죠.

ibm 이나 레노보의 11n 을 지원하는 무선랜을이 다 atheros 의 ar5008 을 쓰더군요.

현재 비스타에 설치해서 테스트 중입니다.


네이버 맥유저 카페에서 자겨왔음winxp_2k.zip

by intercrow | 2007/03/07 05:51 | Mac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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